[로드人터뷰] 이제는 조금씩 정리를 하고 비우는 여행을 해야 할 때 - 도보여행가 황안나
약간은 특별한 인터뷰, 아니 일종의 작은 회고록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최대한 구술한 느낌 그대로를 살리기 위해 표현 등이나 어투를 가공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올해 80의 나이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도보여행가, 그것만으로도 로드프레스가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를 듣기에 충분하다.
작년 11월 22일, 한 걷기여행 카페의 걷기행사에서 인사를 드린 후 해를 넘겨서야 만난 그 날.
반가이 악수를 하고 인천 송도의 한 커피숍에 앉았다. 앉자마자 선생님의 깊은 시선은 기자를 넘어 그 어딘가를 보는 듯 했다. 그렇게 담담히 꺼낸 이야기는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살아 온 이야기, 그리고 걷게 된 이야기를 들으며 기자는 준비한 수 많은 질문들을 그대로 접어 넣었다.
약간은 특별한 인터뷰, 아니 일종의 작은 회고록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길을 걷거나 산을 오르며 우연치 않게 만난 누군가와 동행하면서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 느낌, 산장에서 옆에 몸을 누인 이로부터 듣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잔잔한 성찰.
인터뷰를 보는 이도 그러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첨언하건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먼저 손에 들고 인터뷰를 읽기를 권한다.
*최대한 구술한 느낌 그대로를 살리기 위해 표현 등이나 어투를 가공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79세를 보내고 80세를 맞이하다
12월 18일, 무박으로 부산에 내려갔어요. 부전역에서, 그 전에는 강릉까지 갔었는데 청량리까지 가더라고요, 무궁화호가. 그 동해남부선이 조금 있으면 없어진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타보고 싶었지요.
일찍 부산에 내려가서 보고싶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식사도 하고. 그렇게 저녁까지 먹고 밤 10시 40분에 올라오는 기차를 탔어요. 이것을 타고 원주역에 내려서 치악산을 가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지요.
원주역에 도착하니 다음 날 새벽 4시 40분이예요. 그 시간에 식사할 곳도 없어 부산에서 지인분이 챙겨 준 ‘밤만주’ 두 개와 양갱 하나를 먹었지요.
6시에 택시를 타고 치악산 입구에 도착해서 헤드랜턴을 끼고 한 시간 정도 오르니까 캄캄한 밤이 희뿌옇게 밝아오더라고요.
비로봉 정상까지 올라가면서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어요. 정상에서 사진 좀 찍으려니 운무가 얼마나 잔뜩 끼었는지 하나도 안 보여요. 그때 한 아주머니가 올라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사다리병창으로 내려와 완주를 했죠. 오후 1시에 끝났죠.
소리소문없이 갈 것을…
70대를 마지막으로 보내며 무박 2일 여행을 한다고 올렸더니 사람들이 그렇게 걱정을 하는 거예요. 내가 늙긴 늙었어. 사실 치악산이 험하기도 험하거든요. 물론 사다리 병창부터 전부 철계단으로 해 놓아서 그 때 그 맛이 안나긴 해요.
사실 부산에 내려가서 밤새 완행열차를 타고 원주에 내려 치악산을 오른다는게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요. 그 때 전에 내린 눈들이 산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더라고요. 아이젠을 가져갔지만 가파른 철계단에 얼어붙은 그 눈들이 얼마나 미끄럽고 무섭던지.
한 발 딛고 한 발 내려놓고를 반복하며 “여기가 끝이라면, 내 삶이 여기가 끝이라면…”이라는 생각을 해 봤어요. 두려움도 있지만 ‘그런 것도 괜찮겠다. 이만하면 괜찮겠다.’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예전에 우리 사촌동생이 공수부대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면서 그 동안 지은 죄가 다 생각나면서 용서를 구했대요. 당시 내 마음이 그런 것과 일맥상통 했던 것 같아요. 자연히 내가 겸손해지고 작아지고.
어려운 사람을 만나고 귀한 사람을 만나면 옷 매무새를 다듬듯이, 나이 80에서 세상을 바라보니 마음 매무새를 다듬게 되요. 묵주를 들고 “하나님, 용서해주세요.”하며 치악산을 끝내게 되더라고요.
며칠 전에 문화일보 기자와 인터뷰를 했어요. 그때 기자가 새해의 소망이나 다짐을 이야기 해보라고 해요. 생각해보니 80대라는 시기는 새해의 다짐이나 꿈을 말하는 나이는 아닌 것 같아요.
50대에서 60대에 들어섰을 때 ‘아, 이제 내가 노년에 들어서는구나’, 60대에서 70대로 들어설 때 ‘아, 아직 아픈 곳이 없구나. 70대에는 내가 해 봐야 할 일들을 해야겠다.’. 그런데 80대로 들어서니 100세 시대라 해도 아주 정정하게 사는 것은 소수잖아요?
80대는 이제 정리를 시작해야 하는 시기라는 마음이 들어요. 그렇게 마음을 먹게 되더라고요.
집에 돌아와서 한 달에 10권, 20권씩 사서 모으던 그 수 많은 책들, 남편 서재와 내 서재가 따로 있고, 사면이 책장이고 바닥까지 쌓아진 그 책들을 보며 정리를 시작했지요. 약 2,000권을 기증하고 또 나머지는 지리산에 내려가 마을 사랑방같은 책방 겸 차를 대접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큰 아들이 가져가기로 했지요.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같은 책을 참 좋아해요. 그런데 그 책을 안가져가길래 이것도 좋다고 추천했지요. 그 외에도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 이런 것들도 전집을 다 가지고 있거든요. 단행본으로도 있고. 박완서 작가나 법정 스님의 책도 모두 가지고 있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책을 주기가 또 아까운거야. 그래도 주기로 했으니 다 주는데 그 빈자리를 보니 참 허전하더라고요. 그만큼 비운다는 게 쉽지 않은 거예요.
그 외에도 남편이 70세가 된 기념으로 선물해 준, 몇 번 들지 않은 명품 가방이나 코트 등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줬어요. 그 때도 겉으로는 ‘나는 괜찮아!’라고 하는데 주는 손이 참 머뭇거려지더라고요.
박경리 작가가 이런 말을 했지요.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편안하다.’, 난 아직 그 경지까지는 못 갔네요. 물론 홀가분하기도 하지만…
아직 내가 미련이 많구나…
절대빈곤으로 보냈던 지난 날을 되돌아보다
나는 30년 가까이 ‘절대빈곤’으로 살았어요.
내가 스물다섯에 낳은 큰 애가 지금 쉰 여섯이 되었죠. 그 첫 애를 품고 입덧을 할 때 남편의 사업이 소위 ‘망해서’ 남편이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그 때 선생님이던 내 월급은 모두 빚을 갚는 것으로 사라지고 애 낳은 지 사흘밖에 안된 산모가 외상 쌀을 머리에 이고 돌아다닌 것이죠.
그리고 작은 아들을 1월 3일날 낳았는데 집에 쌀 한 톨, 연탄 한 장이 없었어요. 그때 포천 소흘읍의 초등학교에 근무했는데 학부형이 쌀집을 했어요. 그 앞을 오가며 ‘이번에는 꼭 들어서서 외상쌀을 좀 달라고 하자.’, 하지만 그게 쉬워요? 그냥 지나치며 ‘다시 꼭 얻어오자.’ 그래도 그 말이 못 나와서 몇 번을 그 쌀집 앞을 왔다갔다 했어요.
결국 집에 그냥 와서 메주콩 한 됫박이 있는 것을 불려서 석유 곤로에 삶았어요. 그리고 그것을 씹었지요. 그 핏덩이를 꼭 안고 둘둘 말아 언 방에서 자고 나니 간밤에 삶아 둔 콩이 다 얼어버렸어요. 방망이로 깨서 먹었지요. 먹어야 사니까.
사실 이렇게 산다는 것, 결혼은 또 내 책임이기도 하기에 친정에 일절 말을 안 했어요. 그런데 아기를 낳을 때가 되었는데 소식이 없다보니까 그 날 부모님이 오신 거예요. 와서 보니 밥솥은 밥을 언제 했는지 물 부어놓은게 얼었지, 쌀이나 연탄 하나 없지…
나는 우리 아버지 우시는 것을 그 때 처음 봤어요. 뒤 돌아서서 저 멀리 산을 보시는데 어깨가 들썩이더라고요.
당시 제기역 역장이셨는데 내가 그렇게 사는 줄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결국 내가 잘 사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힘들게 사는 것만 보시고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파. 그런 삶이 그 후로도 몇십년이 계속 되었거든요. 내 첫 아들이 대학을 들어가고 공군을 제대하고 취업이 되었을 때에야 그 빚을 다 갚았지요.
남편도 어쩜 그렇게 하는 것마다 안 되는지…
그때 포천에서 인천으로 발령이 나서 왔지요. 부평의 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6학년 담임으로 2년을 보내니 고생했다고 다음에는 1학년 담임으로 보내더라고요. 그 때 1학년을 맡은 해 11월이었는데 수업을 하다보니 ‘개미와 베짱이’ 단원이 있었어요. 따라읽기를 하는데 베짱이가 “아, 추워. 어디로 가지?”하는 지문이 있었어요.
춥고 배고프고 어디로 갈 곳도 없고.
그 때 아이 둘을 키우고, 남편은 어디로 갔는지 소식도 없을 때고 방세가 몇 달을 밀려서 더 갈 곳이 없었던 때였거든요. “아, 추워. 어디로 가지?” 그 지문을 읽는데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 때 교실 문이 열리고, 지금 말로는 ‘해결사’라고 해야하나요? 채권자가 보낸 사람이 구두를 신은채로 들어오더니 “야! 이 여자가 너희 선생이야?”하고 애들에게 물어요. 1학년 학생들이니 모두 “네!”하고 대답했지요. 그러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이 사람은 선생님이 아니야. 아저씨 돈을 가져가고 안 주는 나쁜 사기꾼이야!”하고 내 멱살을 잡고 끌어냈어요. 우리 반, 내가 가르치는 내 학생들이 다 보고 있는데.
겨울방학을 한 10여 일이나 남은 시점이었는데, 그래도 결근을 안 하고 꿋꿋이 버텼지요. 다른 사람들이 수근대고 멀리 하는게 느껴지니 참 냉혹하게 느껴지더군요. 교직원 식당에 가서 같이 밥 먹자는 사람도 없고. 나도 그들을 마주치기 싫어 그 누구보다 일찍 와서 출근부에 날인을 하고 밥도 먹지 않았어요.
가난이라는게 춥고, 배고프고, 냉방에서 자는 것은 의외로 한으로 안 남습니다. 나를 짓밟고 무시하고 따돌리는 것이 참으로 한으로 남더군요. ‘내가 이렇게 끝나나 보자’ 절치부심하니 두 끼 세 끼를 굶어도 배가 안고파요. 희망만이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그렇게 이를 갈고 살아도 살게 되더라고요. 앓아눕는 일도 없이.
겨울방학을 하자마자 경포대를 갔습니다. 죽으러 갔어요. 왜 경포대냐 하면 남편하고 여행한 유일한 곳이었어요.
그때 장급여관에서 숙박비를 내고 들어가니 수중에 천 원이 남아요. 한 밤에 바닷가로 나가니 12월이니 사람 하나 없고 갈매기만 있어요.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추운지도 모르고 앉아있었어요.
잔잔한 파도라 끊임없이 철썩철썩 밀려오는데 어느 순간 그 파도가 나를 어루만지며 “그래, 내가 너의 마음을 잘 안다.”고 하는 것 같아요. 그 때부터 울기 시작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렇게 끝도 없이 울고나서 “그래, 살아보는거야.”하고 일어났죠. 설마 죽기야 하겠어?
그 때의 그 ‘설마, 죽기야 하겠어?’는 내 좌우명이 되었어요. 내가 국토종단을 처음 떠날 때에도, 운전면허를 처음 따서 연수도 얼마 못 받고 차를 끌고 나갈 때에도, 모든 부분에서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는 그 때의 말이 떠올라요.
상주를 여행할 때, 상주의 자전거박물관을 보면서 그렇게 울었던 적이 있어요.
둘째 아들이 자전거가 그렇게 갖고 싶다고 해서 한 참을 고민하다가 자전거포에서 할부로 하나 산 후 은박지로 둘둘 말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당시 세들어살던 방 밖에 세워뒀거든요. 간 밤에 오줌을 누러 아들들이 밖에 나가다가 발견하고 얼마나 기뻐하고 애지중지 하던지. 그런데 그것도 채권자가 딱지를 붙이고 가져갔어요. 애들이 보는 앞에서. 그 생각이 나니 눈물이 멈추지 않더군요.
결국엔 칠전팔기도 아니고 십전십일기만에 남편도 사업이 성공했고, 첫 애가 대학을 들어가고 공군을 제대하고 취업을 했을 때...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었죠.
건강을 위해 선택한 등산에 빠지다.
정년을 7년 앞두고, 다들 말릴 때 아무 계획없이 그리고 미련도 없이 그만뒀어요. “이젠 좀 쉬자.” 내 솔직한 마음이었어요.
그 땐 사시사철 병을 달고 다녔거든요. 재검을 받으라는게 다섯가지였어요. 가난하게 살면서 굶기를 밥 먹듯이 살아서 그랬던지 막상 악착같이 버틸 땐 몰랐는데 그 때 보니 악성 빈혈, 협심증, 간 수치 이상, 고지혈증, 폐결핵 초기 등 심각했지요. 당시 57세인 나를 불러 앉히고 식단까지 짜 주더군요.
의사가 운동을 권하는데 여태 운동과 담을 쌓고 살았어요. 할 줄 아는 운동이 없다고 하니 수영을 권해서 수영을 했지요. 그런데 그다지 흥미가 늘지를 않아 1년을 하고 그만두었죠.
이번에는 의사가 등산을 권해요. 야트막한 산. 그래서 당시 동아아파트라는 곳에서 백운역 만월산 약사사까지 3년을 다녔어요. 새벽 4시 반에 집에 나와서 거기를 도착하면 5시 반, 거기를 두 바퀴 돌고 내려오면 6시 반, 집까지 걸어가면 7시 반. 비가오나 눈이오나 3년을 쉬지 않고 그렇게 아침마다 운동을 했어요.
그렇게 3년을 한 후 누군가가 “지리산 종주를 해 봤느냐?”고 물었는데 들어보지도 못했지요. 그래서 2000년 11월 4일, 아무런 준비없이 지리산을 홀로 갔어요.
그때 함박눈이 내렸어요. 백두대간 책을 보니 기점이 중산리예요. 중산리에서 로타리대피소까지 가니 한 아저씨가 나와 통제를 시키는 거예요. 눈이 내리니까.
나는 장터목대피소를 예약을 하고 갔는데 거기서 잡힌거죠. 나중에 남편은 걱정이 되서 장터목대피소에 전화를 했는데 내 이름의 사람은 오지 않았다고 해서 난리가 났었다고 하더라고요.
여하간 로타리대피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보니 눈이 허벅지까지 쌓여있어요.
그래도 여기까지 애써서 왔는데 집으로 돌아가는게 너무 억울해서 “나는 그냥 올라간다.”고 하니 대피소의 아저씨가 내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아이젠은 있어요?”하고 물어요. 나는 당시 아이젠이 뭔지도 몰랐어요.
없다고 하며 아래로 내려가면 아이젠을 구매할 수 있냐고 물으니 “있긴 있는데 내려가면 여기로 다시 못 와요.”라고 해요. 그냥 그대로 천왕봉을 오르다가 도저히 못 가겠어서 되돌아와서 내려가 3천원짜리 아이젠을 샀어요. 얼마나 조악하겠어요? 채워지지도 않고 억지로 채우니 발등을 조여요.
그래도 그거라도 착용하고 다시 로타리대피소를 지나며 “저 왔어요.”라고 하니 아저씨가 기가막혀 하시더라고요. 물을 받아서 장터목대피소까지 올라갔어요. 물이 다 얼더라고요.
결국 천왕봉까지 올라갔는데 부산의 산악회에서 올라온 팀이 있었어요.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더라고요. 그 풍경을 뒤로하고 고생을 해 가며 화엄사로 내려왔어요. 결국 이렇게 내려온 후 식구들도 고생시키고 이래선 안되겠구나, 하고 인천의 산악회를 하나 들어가서 처음으로 산악회에서 산행을 했던 것이 가리왕산이었지요. 그게 제대로 된 등산의 시작이었어요.
그때 아무 소개도 없이 혼자 찾아가니 다들 놀랐어요. 아주 자그마한 할머니가 오니까. 뭐 스패츠도 없고 그냥 혼자 산악회 등반을 찾아갔죠, 겨울에. 아는 사람도 없으니 뭐라 말도 못하고 등산화 안에 눈이 들어와 녹아서 찰박찰박하고, 아주 얼어죽는 줄 알았죠. 그게 내 첫 시작이예요.
이후 백두대간도 걷고 한라산은 7번, 지리산은 5번, 설악산은 12번… 모두 종주로 했죠. 정말 그 이후로는 산에 빠진 사람들과 어쩔 땐 일주일에 두 번씩도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녔어요. 불수사도북도 하고 지리산 태극 종주도 하고. 나중엔 해외로 나가서 홍콩트레일, 동티벳, 라다크, 부탄, 일본 등 해외로도 트레킹을 다녔죠. 암벽 릿지까지 했으니까.
처음으로 국토종주와 해안일주를 떠나다.
그런데 65세가 되던 해의 2월이었어요.
아침에 뉴스를 보는데 해남 땅끝마을이 나오는거예요. 그 붉은 황토흙에 푸른 보리밭이 나오고 길가에는 동백이 떨어져 있는 그 풍경… 갑자기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아요.
그 “땅끝”이라는 말,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라는 어감이 주는 그 막막함과 아련한 그리움, 슬픔들이 종합적으로 다가오더군요. “내가 저기를 가야 되겠다.”
그 때 마침 한비야씨가 쓴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라는 책을 읽었거든요.
“맞아, 한비야도 땅끝마을에서부터 걸었지!”
그럼 나도 걸어봐야 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그 책을 꺼내 짚어보니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총 49일이 걸렸더군요.
내가 여기를 가야겠다, 그럼 어떻게 가야하나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한비야씨의 책 정보 이외엔 없어요. 심지어 대학생들 국토종단한 글을 읽기위해 동아리에 회원가입까지 했어요. 그래도 내가 원하는 국토종단은 아니더군요.
마침 오비이락 격으로 3월 21일 인천 산악회에서 광주 무등산을 간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광주 무등산을 갔다가 무등산 하산 후 나는 광주 터미널에서 해남으로 가면 되겠구나.’.
그런데 한 번도 그런 여행을, 그것도 혼자로 해 본적도 없고 또 내가 엄청난 길치이기도 해서 겁이 덜컥 났어요. 무섭기도 했지만 역시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는 마음이 앞섰죠.
먼저 소문부터 냈어요. 산악회 사람들에게 “나 국토종단 떠난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800km야.”라고 말하니 내가 아는 이들 중 단 한명도 격려하는 이들이 없어요.
전부 “누님 미쳤어요?”, “누님 지금 예순다섯이예요.”하며 말리더라고요. 절대 안 된다며 산악회 대장은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다녀와서 내가 “그래, 장 좀 지지자!”고 했지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나는 23일만에 끝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잘못된 일입니다.
여행은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잖아요? 나는 앞만 보고 달린 셈이니까. 사람도 만나고 구경도 하고 해찰도 해 가면서 걸을 것을 지도만 보며 갔으니까요.
한비야씨는 하루에 20km를 걸었는데 나는 시작할 때 겁이 나니까 그 걸음대로 했어요. 한비야씨가 남창에서 자면 나도 남창에서 자고 한비야씨가 강진에서 자면 나도 강진에서 자고. 그런데 강진 다음 3일째 되던 날 한비야씨가 자던 곳에 도착하니 해가 하늘에서 창창한 거예요. 이 시간에 숙소에 들어갈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지도를 보면서 계속 내 걸음을 걸었어요.
완주까지 길은 두어 번이나 잃었나, 국도따라 걷는 것이고 표지판도 잘 되어 있으니까요. 산을 그렇게 타서인지 40km는 하루에 충분히 걸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걸을 수 있어요.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도착지 즈음에서의 일이 기억에 나네요.
당시 내가 야후 블로그의 파워 블로거였어요. 늘 하루하루 걸으며 있었던 일들, 예를 들어 오늘은 보길도에 갔는데 참외를 사서 먹고 깜박 돈을 주는 것을 잊었다가 도둑으로 몰렸다던가 하는 그런 에피소드들을 올리며 걸었죠. 많은 이들이 방문해서 내 글을 읽었어요.
그런데 강원도 양양군 구룡령에 도착했을 때였어요. 내 블로그를 보고 국방부에 있는 분이 전화번호를 남겼더라고요. “통일전망대에 도착하는 날을 알려주면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민통선 구간을 걸어서 갈 수 있게 하겠다.”고요.
그래서 약속을 하고 약속한 날 전에 고성 금강산콘도에서 자고 아침 일찍 걸어서 약속장소인 신고소에 도착했지요. 그렇게 헌병을 대동하고 통일전망대 민통선 구간을 걸어갔어요. 철망을 넘어서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보이는데… 이제 이 여정이 끝나서 좋다는게 아니라 이 여정이 끝나는게 너무 아쉬운 겁니다.
예전 모나카라는 과자가 있어요. 아버님이 서울에서 모나카 과자를 사오면 차마 아까워서 입 안에 넣어도 삼키지 못했는데 딱 그 느낌이 나더라고요. 그 민통선 구간을 정말 아끼면서 걸었어요.
“통일이 되었다면 나는 여기에서 신의주까지 계속 이어 걸을텐데…”.
그때가 새로운 내 길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그래, 다음에는 이 곳, 통일전망대에서 동해 - 남해 - 서해를 걸어서 완주하는 해안일주를 하자!고 각오했지요. 다만 바로 이듬해는 책을 쓰느라 못 하고 그 다음해에 시도했죠.
해안일주는 총 두 번을 했고 올해 3월에 세 번째 일주를 시작합니다. 다만 종주에 의미를 두지 않고 내가 걸을 수 있을만큼 걸을 생각입니다. 너무 오래 집을 비울 수 없는 상황이라 1주일간 걷고 잠시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1주일간 이어걷는 식으로요.
장기도보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가 하니 발이 부르튼 것이 아니라 숙소더라고요. 걷다보면 오후 세시밖에 안된 시간에 모텔이 나와요. 그냥 지나치면 그 이후로 아무리 가도 숙소는 커녕 마을도 없어요. 그래도 내륙은 마을이라도 나오지만 해안도로는 가도가도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많아요.
첫 해안일주를 할 때 거제도에서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그날 밤 9시 반까지 56km를 걸었어요. 비는 내리고. 저는 지도를 보면 도로 옆에 바다가 있어 마을이 있겠거니 했는데 바다가 있기는 있는데 아주 까마득한 벼랑 위에 도로가 있는 것이라 마을이란 있을 수 없는 곳인 것예요.
산모퉁이를 돌아서도 또 산모퉁이. 간혹 시골 도로 옆으로 잠시 차량이 주차할 수 있는, 의자가 놓여있는 그런 곳이 있잖아요? 지붕있는 정자 같은 쉼터.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거기서 잘 수 밖에요. 비는 가려지니 우비 입은채로 배낭을 놓고 드러누웠어요. 너무 무서워서 손에 묵주를 들고 ‘낮에 사람이 다니고 차량이 다니는 길이 어두워졌을 뿐이야, 이 밤중에 강도가 여기를 왜 오겠어? 요즘 호랑이가 있겠어?’하며 기도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불빛이 환해지기에 벌떡 일어나 뛰어나가니 버스 하나가 오는 거예요. 기사도 놀라고 나도 놀랐지요. 타고 나서 보니 버스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한 후 고현면 터미널로 가는 것이었어요.
고현면 터미널에서 내려 인근의 모텔에서 잠을 청한 후 다음 날 택시를 타고 어제의 그 장소까지 가서 다시 이어서 걸었지요. 그 경험 이후 걷다가 3시, 4시만 되면 숙소때문에 불안해지더라고요.
나중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는데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숙소에 있어서는 ‘거저먹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첩 받아 펼치면 알베르게 정보나 거리가 다 나오니 그 거리와 지금 시간을 보며 더 갈 수 있고 덜 갈 수 있잖아요? 나는 너무 편안하게 걸었어요.
지금 동해는 해안누리길이 생겨 숙소 정보가 있어요. 하지만 처음 내가 해안일주를 했을 때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게다가 지금은 핸드폰이 있으니 콜택시를 부르면 되니까요. 그래도 해안일주를 두 번째 할 때에 똑같은 곳에서 같은 고생을 했어요. 거진면 그쪽까지 아무리 콜택시를 불러도 안오더라고. 오기 싫으니까 안받는 것이죠.
참 많은 TV 프로에 나오고 또 인터뷰도 했는데 예전에 “왜 그렇게 걸으세요?”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기 어렵더라고요. 지금은 이 말이 답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 몸이 으슬으슬해서 누워있다가도 “선생님 우리 거기 걸을건데 안가시겠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냥 배낭을 메고 나섭니다. 배낭을 메고 나서는 순간 코 끝을 스치는 바람이 너무 좋습니다. 바람, 햇빛, 새소리, 물소리… 길 위에만 나서면 내가 되살아나요.
저는 식당이 문을 닫아 사탕 열 몇개로 하루를 걸은 일도 있습니다. 숙소도 그래요. 내 한 몸 누일 곳이라면 그게 헛간이던지 여러명이서 누워야 하는 불편한 공간이라도 전혀 탓하지 않습니다. 집 나서면 고생을 할 각오를 할 사람이니 걷는 것 아닐까요?
65세 안나 할머니의 국토종단기, “내 나이가 어때서?”
국토종단을 하고 나니 여기저기에서 책을 내자는 연락이 많이 오더군요. 아니, 무명의 할머니가 여행한 책을 누가 사겠어요? 모두 거절했지요.
그런데 지금 책을 낸 곳인 샨티 출판사의 편집장은 연락이 와서 책을 내자는 소리는 없이 “선생님 한 번 만나뵙고 걸었던 이야기를 좀 듣고 싶어요.”라고 하네요. 그래서 “왜요? 걸으시게요?” 하고 물으니 ‘그건 아니고 그저 궁금하다, 나중에 걸을 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 집으로 불렀지요.
내 집에 와서 점심을 같이 먹고 묻는 이야기에 대답을 했지요. 별의별 이야기를 다 했어요. 무섭지는 않았느냐, 어디가 풍경이 제일 좋았느냐, 누구에게 추천한다면 어디를 추천하겠느냐… 이런 이야기를 한 네시간을 한 것 같아요.
그러고나니 편집장이 “선생님, 지금까지 제게 한 이야기를 그대로 쓰시면 되요.”라고 하네요? 그 때가 4월이었는데 12월 말까지만 써 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어디를 가던지 기록을 하고 다녀요. 23일간의 기록에는 쓴 돈까지 모두 기록이 되어있어요. 그렇다면 쓸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12월말에 다 써서 보내놓고 나서 나는 한 달간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떠났지요.
한 달만에 돌아오니 메일이 하나 와 있더라고요? 읽어보니 출판사에서 보낸 것인데 “선생님, 원고를 다 읽어봤는데 죄송하지만 다시 써 주셔야 할 것 같아요.”라고.
이유가 뭔고 하니 내 블로그에 들어가서 내가 살아 온 이야기를 편집장이 읽어보니 내가 녹록치 않은 삶을 산 것을 알고 그런 삶의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길 속에 녹여내고 싶었던 것이죠. 아까 말했던 그 상주 자전거박물관에서 눈물을 흘렸던 일이라던가. 그런 것을 길 속에 넣어서 써 달라는 것이었죠.
너무 힘들었어요. 분량도 그렇고 넋두리가 되기도 싫고. 어디에 어떻게 맞춰서 넣어야 할 지 모르겠고. 그렇게 3월까지 다시 써달라 하는 것을 8월에 다시 써서 보냈죠.
출판사에서 제목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묻기에 몇 초도 고민하지 않고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했지요. 국토종단 23일, 사람들이 다 말릴 때 난 했잖아요? 도전적이기도 하지만 이만큼 의미가 있는 제목입니다.
예순 여섯살에 낸 책, 지금 기준으로 14년 전에 낸 이 책의 인세를 지금도 받네요. 20쇄가 나갔다고 하네요. 어디의 걷기 모임을 나가더라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을 만날 때가 많아요.
옛날에 내가 고등학교 때 <학원>이라는 잡지가 있었어요. 전국의 중고등학생이 보는 잡지였는데 그 잡지에 산문이나 시를 써서 3회 추천을 받으면 아무때나 자신의 글을 실을 수 있었어요. 일종의 등단 같은 개념이었죠.
그런데 저는 그 3회 추천을 받아 아무때나 내 글을 실을 수 있었어요. 원고료도 받고. 종종 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나가 장원도 받고.
나는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꿈 꿨지만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아버지에게 ‘너는 대학을 못 보내니 그렇게 알라’는 말을 듣고 사범고등학교를 들어가 졸업 후 선생님이 된 케이스거든요? 작가가 된다는 것은 어렸을 때 부터 내 꿈이었죠.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서점에 가면 내 이름이 적힌 책이 꽂혀있는 것이 꿈이었어요. 출판사에서 내 책이 발매되었다는 말을 듣고 서점에 가니 쌓여있는 거예요. 너무 두근두근 했지요. 그렇게 전면에 쌓이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고 하더라고요.
또 다른 곳을 가니 여행관련 책 코너에서 아무리 봐도 안보여요. 검색을 해 보니 에세이로 분류가 되어 있더라고요. 가서 보니 내 책이 꽂혀있는데 어느 남성분이 와서 한 권을 꺼내 훑어보는 겁니다. 얼마나 심장이 쿵쾅쿵쾅 떨렸는지 몰라요. 그 남성분이 두 권을 꺼내서 계산대로 가는데 내 마음 같아서는 그 책 값을 내가 대신 내주고 싶었지요.
지금까지 총 4권의 책이 나왔습니다만 첫 번째 책인 <내 나이가 어때서>는 참으로 기억에 많이 남는 책입니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제 나이가 되면 산다는 것은 견디는 것이더라고요. 지금까지 그렇게 견뎌왔는데 아직도 견뎌야 할 게 생기는 것을 보면 참 삶이 대단해요.
그래도 가끔 송도의 센트럴파크를 한 바퀴 돌며 걷다보면 트라이볼도 시간에 따라서 트라이볼 밑의 물 무늬가 변해요. 이른아침, 석양, 흐린 날, 눈이 올 때… 수십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풍경을 걸으며 찍다보면 그런 견뎌야 할 것들이 생각이 안 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참 이만큼이면 내가 걸을만큼 걸었다. 할 만큼 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전국 지도를 펼쳐놓고 내가 걸었던 길, 구간을 표시하면 누비이불 같아요. 그것을 보면 별 미련이, 여한이 없어요. 정말 다 해본 것 같아요.
그리고 또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요. 늘 걸을때마다 감사기도를 하게 됩니다.
장기도보를 하려면 다섯 가지가 필요하더군요.
첫째가 체력, 나는 산을 하도 많이 다녀서 기본 체력이 되어있어요.
둘째는 돈, 돈이 있어야 됩니다. 해안일주를 할 때 하루 한 끼 사먹는 경우가 많아요. 문을 닫은 곳이 많으니. 그래도 숙소는 돈이 크게 나가지요? 해안일주에 130일간 700만원을 썼습니다. 온전히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기위해 대한민국 주부가 700만원을 쓰기가 쉽지 않지요.
셋째는 가족의 이해, 몇 달동안 나가서 집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가족. 가족의 이해 없이 무작정 떠나면 과연 그게 편할까요?
넷째는 시간, 자신의 목표를 위해 낼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다섯째가 중요하죠. 위의 네가지를 모두 갖춰도 이게 없으면 못 떠납니다. 바로 용기입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내 또래의 사람들 중에서 이 다섯가지를 모두 갖춘 이가 얼마나 있을까요?
나는 참 행복한 할머니죠?
잔잔히, 길게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간간히 눈물을 글썽이는 선생님의 모습, 그 이야기를 들으며 기자도 꽤나 먹먹함을 참았음을 밝힌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며 다시금 그 소회를 듣노라니 ‘세상은 참으로 알 수 없다.’는 말 마저도 한 없이 가볍게 느껴진다.
이번 인터뷰는 우리가 걷는 길, 걸어야 할 길, 추천할 길 혹은 그런 길이나 걷기에 대한 정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기에 꽤나 특별하다. 당장 그것이 ‘무엇’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지만 적어도 한 어르신의 삶의 이야기는 각각의 장면마다 현재의 우리가 당면한 부분에 대해서 힘을 북돋아주고 또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누군가의 이야기를, 다른 질문으로 끊지 않고 담담히 들은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독자가 이 지면을 읽을 때라면 인터뷰의 초입에서 왜 커피 한 잔을 준비하라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당신이 그 길 위에서 낯선 누군가를 만나 그 이야기를 듣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겠는가? 이번 인터뷰가 그런 경험의 간접체험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본 인터뷰는 2019년 1월에 진행된 인터뷰로, 월간 로드프레스 2019년 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