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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신의 길’을 생각없이 걷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느리더라도 자신의 길을 자신의 생각대로 걷는 한 해가 되기를>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최고로 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다녀온 것, 거기에서 내가 본 것은 정말 소중한 경험이다. 그 경험은 절대 다른 이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그러면서 끊임없이 타인들에게 그 경험을 상세히 풀어 자랑하는 것은 어떤 심리일까?).

물론 경험과 감성을 객관적으로 수치화 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미지의 영역이다. 어떤 연산으로도 수치화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거기에 ‘자신의 고정관념’을 집어넣으면 매우 간단하게 수치화가 된다. 적어도 그 수치를 퍼센트(%)로 따진다면 100%가 된다. 그리고 그 100%는 ‘기준’, 순 우리말로 ‘잣대’가 된다.

세상의 수 없이 많은 길들, 다양한 길들은 저마다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매력들은 사람의 시선에 따라 저마다의 색채를 뽐낸다. 빛에 다이아몬드가 빛나듯이, 프리즘 색을 일일히 채도와 명도를 나뉘어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갈래의 색채가 존재한다.

어느 길의 특정한 지점에서 특정한 풍경, 포인트를 바라보는 것도 당시 걷는 이의 몸 상태, 동행인의 유무, 관심사, 목표, 하루 도달량의 어느 시점인가에 따라 감상이 틀려질 것이고 거기에 계절, 날씨 등의 외적 요인까지 더해지면 도저히 같은 감상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어쩌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겠다. 수 없이 사방팔방으로 그 구간을 마스터하지 않는 이상, 단편적인 첫 만남에서 개인이 보는 시선은 딱 그와 같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가 본 것과 자신이 느낀 것에 대한 절대적인 단정은 신앙과도 같다. 그 신앙은 참 순수하면서도 강력하다. 이단심판자와 같이.

연말, 정초부터 흥 깨지게 무슨 재미없는 이야기냐 반문할 수 있겠다.

그래도 오히려 다가올 신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꺼내는 이야기는, 어느샌가 길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특정 길에 대한 집착아닌 집착, 자랑아닌 자랑, 일종의 ‘인증’과도 같은 시선이 번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걷는 이라 말할 수 없지요.’, ‘적어도 거기 정도는 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발언 속에서 그 길을 가지 않았던 이는 위축됨을 느낀다. 심지어는 제 삼자가 보기에 이 주눅든 이가 상대보다 더 다양한 길을 걸어보고 더 많은 경험을 했음에도 특정 ‘길’에 대한 경험이 없기에 스스로 초보가 되어버린다. 주변에는 그런 말에 위축되지 않기 위해, ‘타이틀’을 달기 위해  큰 돈과 시간을 들여 떠나는 이들도 많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자랑스레 그 길을 걸었던 이의 목표를 묻는다.

그저 정처없이, 아무런 생각없이 무턱대고 걸었다면 모를까(사실 그렇게 걷는 것을 내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걷기 방법이라 본다.),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을 얻기 위해’라는 두루뭉실하면서도 또 나름 구체적인 목표가 나온다면 뒤 돌아서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나 자신을 찾는 것이 목표라면, 수천 수백 km를 힘들게 걷고 나서 찾은 자가 현명할까, 뒷동산을 짧게 산책하면서도 찾은 자가 현명할까?’

긴 거리와 긴 시간을 투자하며 걷는 것이 어떠한 ‘삶의 진리’나 ‘인생의 방향’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 시간을 독서에 투자하고 인생의 멘토를 만나 대화하고 배우는 데에 쏟을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어떤 길을 다녀온 것이 훈장이나 증명서가 되어 자신의 앞날을 비춰주거나 어떠한 삶을 담보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길이라는 것은 그렇게 큰 기대를 품은 이에게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어긋난 허망함을 주고 반대로 큰 기대를 품지 않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지 않은 채 걸은 이에게는 예상 이상의 선물을 주는, 참으로 얄궂은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길을 가고 싶다고 ‘스스로’ 마음을 먹었을 때,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답사기를 참조하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얻어야 할 것은 교통, 편의시설, 각각의 포인트, 그 외 길을 보다 안전하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다양한 수치화 되고 문서화 될 수 있는 정보들이다.

개인들의 감상과 그 속에서의 사람들과의 깜짝 만남과 인연 등이 주는 일종의 ‘이벤트’적인, 로맨틱한 감상이 그대로 자신에게도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고, 온전히 그 길에만 집중하자. 정보와 사전 준비는 철저히, 나머지는 무한대로 비워두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 비워진 머리와 가슴을 가지고 걷는다면 그 순백색 캔버스에 그어지는 선 하나, 떨어지는 물감 한 방울이 모두 작품이 된다. 그렇게 자신의 가슴 속에 그려지고 쓰여진 답사기는 온전히 자신을 위한 것, 자신만의 것이다.

혹여 남들이 추천하는 길, 그리고 남들의 뒤를 따라가는 걷기로 보낸 2018년이라면 2019년에는 조금 더 자신이 스스로 주도하고 자신만의 걷기를 해 보자. 그리고 좀 더 내려두고 비우기에 집중하자.

물론 이렇게 쓰는 것 조차 독자들에겐 간섭이 될 테고 훈수두기로 여겨질 것이다. 부디 그렇게 여겨진다면 오히려 필자로서는 고마울 노릇이다.

그래도 ‘좀 걸었다.’면서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훈수를 두거나 방향을 제시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혹여 자신이 그런 이들 중 하나였을 것 같다면 아래의 일화를 참고하거나 들려주기를 바란다.


한 한국인 여행자가 스위스의 공항 내 여행자 센터에서 정보를 뒤적이던 한국인을 만나 반가이 말을 붙였다.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오셨군요!”

“네.”

“사실 저는 유럽을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스위스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부터 시작해 발트해 3국인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도 모두 둘러보았답니다.”

“그렇군요.”

“폴란드, 벨로루시, 루마니아, 불가리아, 러시아 등 동유럽의 나라와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 북유럽의 나라도 다 돌아봤답니다. 유럽은 더 갈 곳이 없을 정도로 빠삭하죠. 역시 여행은 유럽 여행이죠.”

“대단하시군요.”

“그래서, 실례지만 선생님은 어느 곳을 가십니까? 제가 스위스의 모든 곳에 대해 조언 해드릴 수 있습니다. 스위스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어디라도요!”

“저는 아프리카에 빠져 아프리카를 여행하려는 사람입니다. 잠시 경유시간이 길어졌을 따름이죠.”

 


댓글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