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e By

광고문의

[칼럼] ‘둘레길’이라고 무조건 둘레로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참으로 무섭다

2007년, ‘제주올레길’이 이 땅에 최초로 생겼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8년, ‘지리산둘레길’이 시범구간을 열었다. 이후 이 땅에는 소위 말하는 ‘둘레길’ 열풍이 불었다.

창세기와도 같다. 어느 곳이건 ‘둘레길이 있으라’ 하시매 금방금방 수억~수백억의 예산이 책정되어 우후죽순 생겨났으니 이를 보고 몇몇 업체들과 지자체의 높으신 분들, 건설/토목업자는 매우 만족해 하였더라.

그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어느 순간 ‘둘레길’이란 것은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지리산둘레길은 분명 지리산의 둘레를 도는 길이다. 하지만 어느 지역이던간에 걷기여행, 도보여행 코스를 만들며 ‘둘레길’을 붙였다. 둘레를 돌지 않아도 둘레길이다. 그 자체가 걷기여행을 지칭하는 대명사이다.

아니, 자장면이건 짜장면이건 좋다 치자. 이미 굳어져버린 쓰임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이해가 된다. 어차피 언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특징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이 ‘둘레길’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 그 단어의 원뜻을 살리려는 무모한 시도가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갑갑한 일이다.

<지리산둘레길 구간지도. 정말로 지리산의 둘레이다.>

애시당초 길이란 어느 목표지점까지 가기위한 경로이다. 그리고 그 목표지점까지는, 적어도 인류를 포함한 동물들은 최단시간에 갈 수 있어야 했다. 그 이후 조금 더 효율적으로 머리를 굴린다. 위험한 곳은 피해가고 중간에 이 곳을 거쳐갈 필요가 있다면 들러서 갈 수 있게끔 고안하고. 

대부분의 생각들은 이런 ‘효율성’에 있어서는 뜻을 같이 하기에 ‘가장 짧은 거리’를 넘어서 ‘가장 보편적인(안전하면서도 편리한) 경로’는 확정된다. 그것이 ‘길’의 탄생이다. 여기에 도구를 사용하고 공사를 통해 지형지물을 정복하면서 다시금 ‘최단경로’를 찾게 되는 것은 인류가 문명을 열어제낌과 동시에 함께 시작된 행위이다.

재미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길’이 왜 ‘길’인가 짚는것은 결국은 그 길 위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길에 쌓인 무형의 가치들이 재발굴되어 순례길이 되고 존 뮤어 트레일이 되고 쿵스레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온전히 ‘관광’을 위해 탄생된 길은 이런 자연스러움을 완벽히 거스른다. 일단 사람들이 와야 돈이 되기에 지역의 관광자원을 억지로 끌어넣고 그 관광자원과 관광자원 사이의 구간을 어거지로 끼워넣는다.

가만히 보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걷는 이의 목적이나 목표가 무엇인지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기형적인 ‘둘레길’이 생겨났는가?

그래, 차라리 그것까지도 더 봐주자.

이런 무책임한 둘레길에 대해 정리도 하지 않은 채 새롭게 시작되는 ‘진짜’ 둘레길들을 보면 차라리 이젠 그런 얄팍한 머리에서 나온 기형적인 둘레길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코리아둘레길, 경기둘레길 등 크게는 대한민국과 도, 작게는 시와 군의 둘레를 잇는다는 둘레길들을 보면 ‘도대체 무슨 의미로…?’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한국인이라면 이 땅을 사랑해야 한다, 어디 도민이라면, 어디 시민이나 군민이라면…이라는 기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마음이 그 땅의 ‘둘레’에 어떻게 통용되어야 하나? 왜 이제와서 그 ‘둘레’에 그토록 집착을 하느냐 이 말이다.

가치있는 길이라면 당연히 사람들이 이전부터 오간 길이고 그렇기에 그 길에서 이 땅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수많은 이야기가 쌓여져 갔을 것이다. 장을 보기위해 어쩔 수 없이 넘어야했을 고개와 고개사이의 길도, 과거를 보러가기위해 지나야 했을 산 밑의 길도 지금은 포장이 된 도로로 변했거나 혹은 임도로 남아있더라도 그렇게 옛적부터 효용성을 인정받아 온 길이다. 찾아보면 아직도 오솔길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구간도 수두룩 하다.

이렇게 유구한 지역의 스토리텔링은 이제는 의외로 ‘찬밥’신세다. 특정한 행정구역의 경계를 따라 ‘진정한 둘레길’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기에 그 안의 수많은 이야기는 배제된다.

<코리아둘레길. 남해안길은 ‘남파랑길’, 서해안길은 ‘서해랑길’로 명명되었다.>

사실 따지면 ‘둘레’는 ‘경계’이고 ‘변두리’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이 많지 않았고 교통이 한정적이었다. 그러니 민가도 드물었고 사람들이 모이는 거리가 없었다. 왜 ‘관문’이 관문이었고 거기에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는지부터 생각해보라.

물론 지금에서야 그런 시대가 아니고 지금의 행정구역이 옛부터 확정된 부분이 아니라 강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으로 묻겠는데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지역의 주민이 왜 경기도의 둘레를 걸어야 하는지, 그 안에서 경기도가 가진 무한한 가치와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위해 많은 돈과 엄청난 시간을 써야하는지 대답해 줄 사람이 있는가?

만에 하나 그러한 사람이 다만 몇이라도 있다고 한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수십, 수백억의 예산을 쏟아넣어 조사를 하고 길을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경기도민이라면 경기도에 산다는 자부심과 뿌듯함으로 언젠가 한 번 -마치 태어나서 한 번은 메카를 향한다는 이슬람의 성지순례나 조캉사원을 향해 오체투지로 나아가는 티벳인들처럼- 반드시 걸어야 할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얼마 전 한 지자체를 만난 일이 있다. 

그 지역의 굉장한 자연환경이 주는 천혜의 자원과 그 지역의 이미지와 특징,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며 걸을 수 있으면서도 90% 이상의 녹지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무엇보다 수백km가 아닌, 1박2일에서 2박3일로 종주할 수 있으면서도 대중교통이 편리한 길, 나눠서 언제라도 이어걸을 수 있는 길을 고안하고 제안했다. 

결과적으로는 제안이 잘 되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으로 기분 상할 일은 아니다. 당연히 이런 제안이 그 자리에서 채택되는 법은 드물다. 안타깝더라도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작년에 수억원의 돈을 써서 자신들의 지역의 ‘둘레’를 도는 길에 대한 연구용역을 마쳤다며 보여주는 보고서와 지도는 아찔할 정도였다. 

그 시/군이 가지는 장점이나 특성은 찾기 어려운채 말 그대로 지역의 경계만을 위한 길이었다. 개인적으로 그 지역을 잘 알기에 각 변두리의 대중교통 사정또한 막막함을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변두리로 접근하고 길을 걷고 되돌아 올 것인가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했다. 아니, 애시당초 누가 그 넓은 시/군의 변두리로만 걷고자 찾아올 것인가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수억원짜리 보고서의 무게감이란 무섭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시간과 예산을 들인 보고서도 “단절구간에 대해서 더 조사해야 하기에 완성이 아닌” 것이라 한다. 당연하다. 그 첩첩산골, 오지와도 같은 곳에 얼마나 길이 잘 나 있겠는가. 단절구간인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구간을 이으려면 결국 도로로 나와 걷거나 아니면 새로이 길을 ‘조성’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해서 꼭 둘레를 돌아야 한다는 것은 계란의 껍질과도 같은 것이라 본다. 누구나 계란을 그리라고 한다면 그 껍질의 테두리를 원으로 그리며 완성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 계란을 맛보려면 껍질을 깨고 안의 내용물을 취해야 한다.

이제는 “둘레길”에서 “둘레”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 둘레의 본질을 찾아나가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어차피 지자체의 사업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면 그 사업은 성공해야 할 것이고, 성공하려면 아주 얄팍한 상술이거나, 혹은 그 상술이 먹히지 않아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없어도 적어도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는 공적인 가치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 가치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신이 수백km의, 길게는 수천km의 겉둘레를 도는 것 만으로 그 안의 모든 유무형적 가치를 느끼고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이 글의 맨처음으로 돌아가 창세기를 쓰기를 바란다. 

그 정도라면 이미 일반적인 인간의 깨달음을 초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4500km의 코리아둘레길을 알리는 보도자료의 제목이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3배 긴…”으로 시작되는 것을 보고 그 창피함에 식은 땀과 함께 온 몸이 떨렸었다. 필자도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라는 의미일게다.

 


댓글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