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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을 걷고싶다] 천년의 순례, 기이(紀伊)의 유혹 ‘구마노고도(熊野古道)’

기나긴 일본 열도, 그 열도 내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성스러운 땅으로 숭배받는 지역이 있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와카야마현, 미에현, 나라현을 잇는 기이반도의 남부로 ‘기이산지’라 한다.

이 곳은 예로부터 ‘신들의 영혼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사람들은 이 곳을 ‘구마노(熊野)’라 불렀다.

<와카야마현 내, 구마노고도를 포함한 참배길을 소개하는 지도>

이 지역에 머무는 신들을 모신 큰 신사 세 곳이 있는데 바로 구마노혼구타이샤(熊野本宮大社), 구마노하야타마타이샤(熊野速玉大社), 구마노나치타이샤(熊野那智大社)로, 이 셋을 모아 구마노삼산(熊野三山)이라고 한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구마노 삼산에 대한 신앙이 높아지면서 상왕·귀족들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구마노지역을 걸으며 각 신사를 참배하는 순례의 여정을 떠났다.

“개미의 구마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 험한 기이산지를 오르고 또 걸으며 99왕자를(99개의 작은 신사, 사적들마다 왕자(일본어 발음으로 오지라고 한다.)의 이름이 붙어있으며 그 중 큰 5곳은 오체왕자(五体王子)로 별도로 지정되어있다.)를 만나게 된다.

이 ‘왕자’라 불리는 작은 신사 및 사적들은 참배의 여정 중 무사를 기원하고 안전을 바라는 마음으로 귀족 및 왕족들이 지은 것으로 자신들의 무사 참배 뿐만 아니라 이 참배길을 걷는 모든 이들의 안녕을 빌고자 세운 것이다.

2004년에 이 구마노 삼산과 나라현의 요시노와 오미네(슈겐도의 성지), 고야산 진언종의 성지인 고야산 등 기이 산지의 3곳의 영장(靈場)과 세 곳의 참배길이 ‘기이 산지의 영장과 참예도(紀伊山地の靈場と參詣道)’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순례길’로 세계유산에 등록된 것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포함, 유이한 일로, 그 역사와 가치를 인정받은 길인 것이다.

<1,000번째로 Dual Pilgrim 인증서를 받은 순례자 Stephen Bugno>

그래서 구마노고도와 산티아고 순례길을 모두 걸은 이는 ‘dual pilgrim’으로 별도의 인증서를 준다. 협력관계가 매우 잘 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미슐랭 그린 가이드에 별 셋의 만점을 받게되어 이 곳의 자연 가치에 대해 전 세계가 주목하게 된다.

다양한 구마노고도의 루트 중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많은 참배자가 걸은 구간은 바로 나카헤지(中辺路)이다. 타나베시에서 구마노혼구타이샤까지 84km의 길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다고도 하며 그 외 기이산지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자연 풍경과 온천으로 유일하게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노미네 온천도 만날 수 있다.

시간이 없는 이는 핵심 구간인 핫신몬오지(發心門王子)에서 구마노혼구타이샤(熊野本宮大社)까지 약 6.9km, 3시간 정도의 코스를 걸어볼 수 있으나 많은 이들은 단 하루라도 온전히 나카헤치를 위해 시간을 내어 걸어보기를 권하고 있다.

<츠기자쿠라오지~구마노혼구타이샤까지 22.1km의 트레킹 코스 지도>

천천히 마음을 정리하고 풍경을 떠 올려 본다.

와카야마현은 오사카부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태평양을 접한 지역이다. 그 완만한 기후는 이 곳의 산에 ‘신령함’을 불어 넣었다.

빽빽하게 솟은 삼나무, 그 사이로 드문드문 만나는 작은 마을들, 곳곳에서 참배객을 맞이하는 왕자를 지난다. 돌이끼 가득한 계단은 천 년의 세월을 닮았다. 곳곳의 돌에 새겨진 지장보살의 안내를 따라 오르는 그 길에 그윽하게 안개가 서린다.

<구마노고도를 걷는 참배객의 전통 차림. 남성의 경우 더 소박하고 거칠다.>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슈겐도 법사의 낭창한 법문 소리 아래 수백년의 세월을 거슬러 이 곳을 오르는 참배객과 시간을 뛰어넘는 만남을 가진다. 그렇게 스쳐가는 잔상속에 묻어나는 향내음을 맡는다.

걸음 하나에 발원을 담고 내쉬는 숨 하나에 번민을 보낸다. 흐르는 땀 하나마다 속죄가 담겨있고 땅을 찍는 지팡이 자욱마다 뒤 따르는 이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는다.

어느새 자신의 허물과 크기를 깨닫게 되면서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한 시선과 마음을 세운다. 그렇게 발심하여 걷는 걸음은 그 자체가 공양이고 그 자체가 공덕이다.

<돌계단을 오르는 하이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역사적 상흔과 그들의 옛 문화는 보잘 것 없다는 것에서 나오는 우월주의에 입각해 한 나라가 가지고 있는 가치있는 자연과 산, 길에 대해 평가절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최근에는 또 다른 시코쿠의 순례길인 오헨로길과 더불어 일본의 여러 새로운 길들을 걷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일본 알프스 트레킹이야 이미 유명한 여행상품이다.

다만, 외국의 길을 걸을 때에는 국내의 길 처럼, 그 길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역사를 먼저 알고 그 길이 지금까지 사랑받고 관리되고 지켜지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그 길이 가진 기나긴 시간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단순한 트레킹이 아닌, 그 길 위에서 수행을 하고 참배를 하게 될 것이다. 참배의 대상이 전부 다른들 어떠랴,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구마노나치타이샤(熊野那智大社)와 나치 폭포>

가을이 깊어지는 어느 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돌계단에 앉아 잠시 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온전히 내 모든 허물을 내어놓고 산의 기운으로 씻고 채우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다른 어느 길 보다도 순례길, 참배길이 매력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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