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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과 음악] 물새는 넘나드는데… 임진강(イムジン河) by 포크 크루세이더즈( フォーク・クルセイダーズ)

2004년 여름, 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후쿠오카 공항에 내렸다.

당시 故 김대중 대통령의 한일 문화교류와 협약 이후 이미 많은 이들이 일본에 배낭여행을 떠났던 시기였고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이미 한국인 관광객들로 유명 관광지는 북적대던 시기였다.

20대 중반이 넘어선 나는 당시 참으로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1997년 대학 신입생이었을 때 학생의 신분으로 일본을 갈 수 있는 방법은 유학이 전부였다. 여행으로 가고 싶어도 500만원이 통장에 들어있는 잔고내용을 증명하고 또 귀국 보증인을 세워야 했었다. 20년 전이라 기억이 가물하지만 거의 그리하였다.

그 이외에는 근로 장학생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말 그대로 신문배달을 하여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어학원 등을 다니는 것이었다. 당시 동아리에 그렇게 일본을 다녀온 예비역 선배가 있었다. 궁금한 것이 넘치고 넘치던 나를 위시한 동기들은 질문을 퍼부어 댔지만 그 선배는 ‘너무 힘들었다. 그저 새벽부터 자전거로 신문을 배달하고 오후에 공부를 하고… 여행? 그런것은 꿈도 꿔 보지 못했어.’라며 씁쓸히 웃었다.

그렇게 여행에 필요한 회화를 달달이 외웠으나 결국 써 먹어보지도 못한채 세월은 흐르고, 어느새 나는 통장잔고도, 보증인도 필요 없이 일본의 공항에 서 있었던 것이니 어찌 감회가 남다르지 아니하겠는가..

<당시 2004년 여행때의 필자. 후쿠오카에 도착, 구마모토로 향했다.>

그런데 그 감회를 한 방에 씻어내린 만남이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에는 지금 회상하는데에서 오는 약간의 기억의 왜곡은 있을지몰라도 거짓이 없음을 미리 밝힌다.

당시 게이트를 나와 흥분된 마음으로 잠시 서 있는 나에게 한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위 아래로 나를 훑어보더니 대뜸 낯선 억양으로 말을 거신다.

“청년은 남쪽에서 왔소?”

“네, 그렇습니다만…”

“풍채가 당당하시구만. 나는 북조선, 총련계 사람이오.”

그 때 내 뒤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당시 대한민국과 북한의 사이가 꽤 좋은 시기였지만 그렇다 해도 일본에서 북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북한 사람은 아닌 셈이지만) 내가 일본 배낭 여행에서 그렸던 상상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는 일이었고, 어찌돼었건 원하지 않는, 솔직히 무서운 일이었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아니, 나는 회사를 운영하다가 은퇴했소.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이렇게 공항에 나와 앉아서 많은 남쪽 젊은이들이 일본에 오고 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오락거리요.”

기억나는대로 적자면 여하간 그런 이야기였다. 그리고 잠시 자신이 살아 온 이야기를 했다. 나는 듣는둥 마는둥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눈치채지 못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혹여 다른 의심할 만한 사람이 있는지, 가까운 곳에 경찰이 있는지도 확인해 보았다.

내 불안을 눈치챈 것인지 어르신은 염려말라, 나는 그런 위험한 무슨 일을 하려고 젊은이를 부른게 아니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 하였다.

“내 집에 초대를 할테니 와서 남쪽 이야기도 들려주고 하루 묵어가지 않겠소? 내가 대접을 할 테니 말이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 분의 진정성을 의심하기도 전에 이미 ‘총련’이라는 거대한 장벽은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는 이 하나 없는 이 곳에서 만에 하나 무슨 일, 그래 쉽게 말해 납치가 일어난다면 내가 어찌 대응할 수 있겠는가.

그 어르신은 몇 번을 나를 토닥이며 자신의 집에 가자고 했다. 물론 그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되뇌이는 ‘너무나 반갑고 이야기를 듣고, 또 하고 싶어서…’라는 말을 믿고 싶었으나 불행히도 아직 나에겐 그 것을 허락할 용기가 없었다.

무턱대고 아무 여정 없이 온 여행이건만 ‘오늘 만나기로 한 이가 있어서 이만 가야 한다. 죄송하다.’며 거짓 이유를 둘러대었다. 그러니 그 어르신은 어쩔 수 없다며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 그리고 일본을 여행하다가 곤란한 일이 생기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자신에게 전화를 하라고 명함을 주셨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나는 간신히 빠져나와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올라타고 그 안에서 명함을 잘게잘게 찢었다.

<영화 박치기>

이후 2006년에 국내에서 개봉한 일본 영화 ‘박치기(パッチギ!)’를 볼 때마다 나는 ‘다시금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하고 그 때의 그 공항에서의 만남을 떠 올린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배웅하던 어르신의 떨리는 목소리와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잘게 찢겨진 명함이 선명하게 떠 오른다. 그 어르신의 생김새는 잊었을지라도 그 묘한 어투의 ‘재일어’와 명함은 잊혀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포크 크루세이더즈’의 ‘임진강’과 더불어 그 때의 기억은 계속 남아있다.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ザ・フォーク・クルセダーズ)>

일본의 전설적인 포크 밴드인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ザ・フォーク・クルセダーズ)의 첫 번째 자체제작 싱글에 실린 이 ‘イムジン河'(임진강)은 그들이 아마추어 시절부터 불러왔던 곡이다.

당시 북한의 가요, 그것도 출처 등을 정확히 알지 못한채 전해내려온 이 노래는 ‘전공투’의 세대들에게 일종의 ‘혁명가’이자 ‘평화의 노래’로 울려퍼졌다.

물론 실제로 자료를 조사해보면 1958년에 북한의 기관지인 ‘조선음악 8월호’에 실린 것이 최초이고 (작사 박세영, 작곡 고종한) 일본에는 1960년에 조총련 산하의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겸 노래악보집인 ‘새노래집 제 3집’을 통해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아주 작은 곳에 실린 이 노래는 특유의 구슬픈 멜로디와 서정적 가사로 당시의 격동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이제는 그들의 베스트 앨범과 재발매 앨범을 통해 당당히 들을 수 있다.>

이 노래를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가 부르게 된 계기도 꽤나 재미있다.

영화 ‘박치기’의 원작인 자전소설 <소년 M의 임진강(少年Mのイムジン河)>의 작가이자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의 멤버인 마츠야마 타케시가 교토 에서 중학교 시절, 서로 싸움에 몰두했던 교토 조선 중고급 학교 학생들에게 축구 경기를 신청하기 위해 조선 학교를 방문했다. 그 때 교정에서 이 곡을 들었던 것이 계기이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도 꽤 잘 묘사되어 있다.)

당시 마츠야마는 트럼펫 연습을 쿠조 대교에서 종종 했었는데, 같은 장소에 색소폰 연습을 하기위해 나와있던 조선 학교의 여학생과 친해져 당시 교정에서 들었던 그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를 배웠고 차후 가사를 일본어로 번역(그의 누나가 적어 주었다고 한다)하여 아사히 사전과 함께 그여학생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츠야마 타케시가 흥얼거리는 멜로디를 또 다른 멤더니 카토 카즈히코가 받아 채보하여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의 ‘임진강’이 완성된다.

하지만 이 노래를 부른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는 당시 한국과 일본, 심지어는 원곡의 해당국가인 북한에서도 트집을 잡히게 된다.

북한 당국에서는 ‘정확히 작사가와 작곡가를 표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노래임을 밝히라’는 주문을 함과 동시에 가사를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원곡의 가사는 ‘북한의 잘 사는 모습을 나한에 전해다오’의 의미인데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가 부른 2절은 말 그대로 분단의 비극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고 있기 때문에 심사가 뒤틀린 것이다.

정상수교국가가 아닌, 어찌보면 국가라 인정하지 않는 곳의 정식명칭을 넣는 것에 부담을 느낀 일본의 레코드사는 발매를 취소하고 이미 팔린 앨범을 제외한 시중의 앨범들을 전량 회수하기 시작한다. 또한 대한민국도 ‘이런 노래가 방송에서 나오는 것을 막아달라.’고 일본에 강경하게 요청, 어느새 이 노래는 라디오에서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 사실에 격분한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의 카토 카즈히코는 ‘임진강’의 기타 코드를 역순으로 배열, 편곡하여 “슬퍼서 참을 수 없어”라는 노래를 제작,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의 다음 싱글로 내었을 정도니 ‘좋은 뜻의 좋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된 세상’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슬펐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수십년이 지난 후에 영화 박치기의 프로모션을 위해 영화사 사람들이 각 방송국을 찾았을 때에도 ‘아 그노래는….’하고 방송사에서 난색을 표했을 정도이니 분단의 비극만큼이나 음악사적 비극을 가진 노래가 아닐 수 없다.

<임진강 맑은 물이 경계가 아닌 그저 하나의 아름다운 강이 되기를…>

군 생활을 임진강에서 한 필자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던 그 강안개와 북쪽의 헐벗은 산하, 그리고 비무장지대 위를 넘나드는 철새들과 그 버려진 생명의 땅을 생각한다.

그리고 당시 일본에서의 짧았던 만남을 떠올린다. 혈기 왕성하던 풋내기 청년은 벌써 40에 이르렀으니 그 어르신은 아직 정정하실까 확신할 수 없다. 15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는 않은 법이니 말이다. 다만 또 그렇게 후쿠오카 공항에 내려섰을 때 그 어르신이 다가온다면, 지금에서는 “그래요? 감사합니다. 어서 가시지요.”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재작년에 찾은 후쿠오카의 공항은 새로이 단장된 지도 한 참이 지나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고 그 어르신 같은 분도 없었지만 말이다.

새로이 시작되는 남북 관계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큰 장벽은 서로간의 마음의 거리와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서로가 서로를 알기를 원하면 결국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양보를 낳게 될 것이고 그렇게 마음의 빗장이 풀리면 물리적인 장벽도 사라질 것이다.

지금에 와서 분단의 이유와 그 책임을 미래를 열어 살아가야할 세대들에게 묻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모든 관계를 회복한 이후에 서로 상처가 나지 않을 정도로 두터운 민족의 정이 흐르고 난 이후, 이제는 그런 것으로 서로 의심하거나 미워하며 경계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질때에나 들여다 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제는 임진강 맑은 물 위를 넘나드는 철새의 자유로움 마냥 서로 묻고 답하는 시대를 열어가고 싶다. 그 때 그 공항에서 나에게 손을 내민 어르신의 마음 속에 있었던 수 많은 질문과 호기심, 그리고 같은 민족인 청년을 보듬고 싶었던 손길이 더 이상 무색하지 않게 말이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일본의 포크 그룹이 이 노래를 부르며 금지된 상황에 분노하고 절규했던 것에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리고 억지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길로 우리는 서로 오고 갈 수 있어야 한다.


 

 

イムジン河(임진강) – ザ・フォーク・クルセダーズ(더 포크 크루세이더즈)

 

イムジン河 水清く とうとうと流る

임진강 맑은 물은 도도히 흐르고

水鳥 自由に むらがり 飛び交うよ

물새들은 자유로이 무리지어 넘나들건만

我が祖国 南の地 想いははるか

나의 조국 남쪽 땅 추억은 머나먼데

イムジン河 水清く とうとうと流る

임진강 맑은 물은 도도히 흐르네

北の大地から 南の空へ

북쪽의 땅에서 남쪽의 하늘로

飛び行く鳥よ 自由の使者よ

날아가는 새들이여 자유의 사자여

誰が祖国を 二つに分けてしまったの

누가 조국을 두개로 나누어 놓았던가

誰が祖国を 分けてしまったの

누가 조국을 나누어 놓았던가

イムジン河 空遠く 虹よかかっておくれ

임진강 하늘 저 멀리 무지개여 뻗어주오

河よ 想いを伝えておくれ

강이여 내 추억을 전해주오

ふるさとを いつまでも忘れはしない

고향은 언제라도 잊을 수 없건만

イムジン河 水清く とうとうと流る

임진강 맑은 물은 도도히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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