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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과 영화] ‘사실은 그 영화가 저를 이끌었어요.’ – 많은 하이커들의 이정표 ‘와일드’

<PCT의 표식. 누군가에게는 가슴을 뛰게 할 표식이다.>

“PCT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영화 와일드(Wild)를 봤어요. 정말 그 영화에 빠져들었죠.”

길을 걷는 이들중 전체는 아니어도 적어도 일부에겐 미국의 3대 트레일(AT, CDT, PCT)중 하나인 PCT(Pacific Crest Trail)는 삶의 거대한 로망이나 다름이 없다.

4,300km의 거리, 멕시코 국경에서 미국을 횡단하여 캐나다까지 이어지는 그 거대한 여정, 6개월을 온전히 바쳐야 하고 무더운 여름, 그늘 하나 없는 사막지대를 지나 우거진 고산봉의 능선을 따라 눈길도 헤쳐야 하는 그 길은 말 그대로 장거리 트레일을 꿈 꾸는 하이커들에게 있어서 ‘언젠가는…’이라는 말을 내뱉게 할 정도로 거대한 위압감과 함께 도전 정신을 끓어오르게 한다.

PCT를 완주한 국내의 하이커 몇 분들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언제나 특정한 길에 대해 인터뷰를 할 때 의례히 묻는, ‘그 길을 떠난 이유’에 대해 모두들 한 영화를 입에 담았다.

바로 ‘와일드(Wild)’다.

<PCT의 초입을 걷는 리즈 위더스푼(셰릴 스트레이드 역)>

물론 한 영화가 100% 온전히 그 길로 이끌었다고는 볼 수 없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문제와 고민, 그리고 도전의식, 혹은 그 어느것도 아닌 극단의 허무도 그 길을 걷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안다. 심지어는 ‘그 길이 유명하니까’(그런 이유면 또 어떠랴?)같은 것도 큰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길을 선택하고 또 그 길에서의 만남과 모험, 스스로 얻기위해 노력해도
얻어지지 않지만 언젠가 문득 뒤돌아보면 느껴질 일종의 성찰과 회한, 만족의 기회를 한
영화를 매개체로 하여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대단하다.
과연 어떤 영화이길래 그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은 인생의 가장 빛나는 6개월을 머나먼
미국에서 4,300km를 걷는데에 쏟게 만들었을까?

이 영화의 초반부를 잊을 수 없다.

아름답게 펼쳐진 능선, 끝 없이 펼쳐진 산악지형이 이 길의 장대한 거리와 난이도를 보여주는 듯 하다. 두 눈이 그 광활한 산세를 훑는 찰나, 거칠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능선을 바라보는 화면에 턱 하니 놓이는 등산화.

바위에 앉아 피에 젖은 발을 꺼내 잠시 휴식을 취하는 여성은 주인공인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이 맡았다.)다.

있는대로 가득 채운 120L 배낭을 세워둔 채 천천히 고통을 참으며 양말을 벗는 셰릴, 이윽고 드러난 발의 상태는 보는 이의 얼굴을 가득 찌푸리게 할 정도로 처참하다.

꾹 참고 덜렁거리는 엄지발톱을 뽑아 내는 그 때, 격렬한 고통에 몸을 누이다 세워 둔 배낭이 쓰러지고, 그 충격으로 얌전히 벗어 놓은 등산화 한 쪽이 천 길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다. (개인적으로는 앞서 양말을 벗을 때 보다, 발톱을 뽑을 때보다 등산화 한 쪽이 떨어졌을 때 격렬히 고함을 쳤음을 밝힌다.)

망연자실하게 그것을 바라보던 셰릴은 마저 남은 한 쪽의 신발을 들어 집어던지며 정말 분노에 찬 욕설을 내뱉는다.

강렬한 도입부가 지난 후 영화는 셰릴의 여정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흐름은 그렇게 고행을 겪는 셰릴의 PCT 여정과 그녀의 소중했던 시간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후의 삶을 오고간다.

<어머니이자 가장 그녀를 잘 아는 친구와 같았던 바비>

유독 어머니와 유대감이 강했던 주인공인 셰릴은 언제나 긍정적이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또한 뒤늦게 찾은 삶을 사랑했던 어머니의 투병과 죽음 이후, 자신의 삶을 말 그대로 방치하기에 이른다.

마약과 문란한 성 생활, 거기에는 그 어떤 목적도, 심지어는 쾌락에 대한 원초적 욕망조차 없다. 그저 삶의 중요한 버팀목을 잃은데서 오는 삶 자체에 대한 방조만이 가득하다. 살아있되 누가 보아도 살아있지 못한 모습이다.

그렇게 무너져가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시 새로이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기 위해 셰릴이 선택한 마지막 심폐소생술이 바로 PCT이다.

<그 길 위에서 그녀는 과연 어떤 구원을 기다렸을까?>

물론 배낭을 매는 법, 스토브는 어떤 것을 고를 것이며, 텐트는 어떻게 쳐야 하는가에 대한 수 많은 궁금증과 사전지식이 필요하겠지만,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그녀는 (수중에 가진 전 재산을 다 털어 준비한) 장비와 의지만으로 부딪히기로 한다.

그리고 그렇게 부딪힌 길은 당연히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거칠게 다가온다.

<PCT를 걷는 하이커들>

많은 이들이 어떤 길을 걸으면서 그 길을 걷는 목적이나 걷게 된 이유로 소중한 이와의 이별을
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그 길을 걸으면서 그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는 일종의 정신적 의례를 거치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단지 그저 자신의 공허함과 떠나보낸 이에 대한 속죄를 채우고자 한 없이 거친 그 길을 걸으며 일종의 자기학대를 통해 일종의 정당성, 혹은 면피를 자신에게 부여한다.

물론 그것이 절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필자는 그 것 자체도 길이 주는 마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그 길을 걸으며 대다수는 결국 길을 걷는 이유를 붙인 것도, 그 길을 걷는 이도, 그 길을 걸으며 진정으로 떠 올리고 되돌아보아야 할 이도 자기자신임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안다. 결국 ‘나는 나, 내 문제는 내가 만들어 낸 것이고 내가 풀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그 길을 걸을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만, 결국은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자신을 향한 고행과 구도, 순례의 길에 있어서 필요 이상으로 엄격함을 지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셰릴도 결국은 엄청나게 챙겨 온 피임도구와 캠핑지에서 드러난 무지함, 그리고 길에서 익숙해지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인연들 속에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가학을 통해 변모하려는 방식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거대한 하나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그런 솔직함 속에서 셰릴은 한 여성이자 사랑하는 엄마의 딸, 남동생의 누나이자 세상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영화의 마지막, 트레일의 중간에서 할머니와 손자를 만나고, 그 어린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맑은 목소리의 노래는 (비록 그것이 야호선(野狐禪)일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하고자 하는 셰릴에 대한 축가이자 찬가이다.

<휴식을 취하는 주인공의 모습>

영화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의 부족함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동명의 자전 소설을 읽어본 이라면 영화속의 인물들과의 좀 더 구체적인 관계나 영향, 다양한 에피소드, 셰릴의 심리적 관점과 동선이 상당부분 거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체의 흐름 내에서 빈번하게 움직이는 시간의 흐름은 가끔은 영화의 감상과 스토리의 이어짐에 있어서 큰 단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혹자는 소설에 비교하며 이 영화는 차라리 나오지 말았어야 할 작품이라 혹평하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 자체가 자신의 문제, 혹은 구체화 되지 않은 열정을 희미하게 발견하고 걷는 여정을 통해서 그것을 해결하고 구체화 시키려는 이들에게 찬사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그녀와 같은 문제와 현실, 상처를 안고 있지 않더라도 저마다 걸을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가 또 하나의 셰릴인 것이다. 또한 셰릴이 그 길을 걸으며 만나 온 수 많은 이들도 셰릴을 또 하나의 자신의 모습으로 볼 것이다.

이 영화는 거시적 관점으로 ‘그래서 우리는 길을 걷는 것이다.’ – 라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른다.

혹은 이렇게 의문형으로 정의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언제 걸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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