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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과 영화] 당신을 돕는게 제 삶이죠 – 다시 태어나더라도, 우리

<다시 태어나도, 우리>

처음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티베트 전통의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중 인도의 라다크에 위치한 한 시골마을의 티벳 불교 승려이자 의사(암치)인 우르갼 리크젠을 촬영하게 된 것.

그의 곁에는 어렸을때부터 남들과 다른 총명함을 가진 소년인 5살의 파드마 앙뚜가 동자승으로 그의 일을 돕고있다.

그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던 어느 날, 앙뚜는 ‘자신은 전생에 티베트 캄에서 수행한 승려였다.’고 말한다. 그 어린 소년의 말 한마디에 작은 마을은 뒤집힌다. 자신들의 마을에 ‘린포체(전생의 업을 이어가기 위해 계속 환생해 태어나는 티베트 불교의 고승, 살아있는 부처)’가 탄생한 것이다.

<린포체로서의 삶을 시작한 앙뚜>

우르갼과 앙뚜의 관계는 변화하게 된다. 늙은 승려인 우르갼은 정성을 다해 이 린포체인 앙뚜를 모시게 되고 그와 함께 기거하며 학교 공부, 수행, 불교 교리를 모두 돕고 가르친다. 거기에 빨래와 식사까지, 말 그대로 부모가 자식을 정성스레 키우는 그 이상으로 이 린포체를 위한 희생에 들어간다.

카메라는 이 둘의 관계를 쫓는다. 처음의 목적은 사라진 채, 이 어린 린포체와 그를 모시는 늙은 승려의 움직임을 잔잔히 관찰한다.

전생에 자신이 몸 담았던 티베트 캄의 사원을 그려내고 묘사하는 모습을 보며 우르갼은 앙뚜가 린포체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종단에 알려 큰 사원에서 린포체로서의 공부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한다.

앙뚜에겐 ‘린포체’임을 밝혔으나 그로인해 스승님이자 부모와 다름없는 (물론 앙뚜에게도 마을에 친부모가 있다.) 우르갼과 헤어져야 하는 것이 받아들일 수 없는 아픔이기에 쉬이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지 못한다. 결국 종단에서 지정한 사원에서는 더 이상 린포체로서의 교육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우르갼은 소년과 함께 마을로 되돌아와 다시 둘 만의 생활을 이어간다.

린포체가 린포체로 가장 확실히 인정을 받는 것은 그의 전생의 사찰, 즉 앙뚜에게는 ‘티베트 캄’에서 승려들이 찾아와 문답을 통해 자신들과 함께 했던 스승임을 확인하고 모시고 가는 것이다.

하지만 진작에 종단을 통해 연락이 닿았을 그 곳에서는 사람이 찾아오지 않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앙뚜는 술 취한 이가 가짜 린포체라고 외치거나 먼지구덩이 속의 린포체라 비웃는 등 마을의 차가운 눈빛을 받게 된다.

<앙뚜를 보살피는 것은 승려인 우르갼에게는 업보이자 운명, 그리고 축복이다.>

혹여나 마음 상하지 않도록 어린 앙뚜를 보듬는 우르갼은 때로는 엄한 스승의 모습으로, 때로는 이보다 더 자상할 수 없는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앙뚜를 가르친다. 그에게는 ‘린포체’의 스승이라는 자부심보다 ‘점점 옛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에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급박함이 더욱 크다.

“저는 그저 시골의사이자 승려로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죠. 이런 저에게 린포체가 찾아왔다는 것은 아마 제 업보거나 운명일 것입니다. 저에게는 행복한 일입니다.”

자신이 담당한 린포체가 그 때를 놓쳐 린포체로서의 인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아픈 일이고 승려로서도 크나큰 직무유기이다.

결국 그 둘은 머나먼 여정을 통해 ‘티베트 캄’을 찾아나서기로 한다.


제작기간 9년, 인도 카슈미르의 라다크 지역, 오지에서도 한 없이 오지인 그 지역의 한 작은마을에서 펼쳐지는 지극히 소박한 일상을 담담히 담아낸 이 영화는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대상’, ‘시애틀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등을 받은 영화로 문창용, 전진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앙뚜가 진짜 린포체인 것인가?’, 혹은 ‘티벳 불교는 얼마나 신비로운가?’ 는 그다지 중요한 테마가 아니다. 한 소년을 품고 또 받드는 늙은 스승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그 소년과의 관계, 그 지독히도 끈끈하면서 또 순수한 관계가 이 영화의 핵심 포인트다.

결국 마을에서 ‘찬밥’ 대접을 받는 앙뚜에게 그가 가져야 할 지위를 되찾아주기 위해, 그것이 자신의 업보이자 운명, 그리고 승려의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있는 일임을 알기에 우르갼은 묵묵히 나아간다. 하지만 결국 그 인자하면서도 강직한 우르갼 역시 인간이기에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그 소년에게 스승을 넘어서 부정(父情)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게 된다.

아니, 부정(父情)보다 클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신의 평생을 바쳐 온 종교속의 숭배의 대상까지 포함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모든 고난이 행복이다.

결국 인도와 중국의 국경까지 가서야 그들은 중국의 국경수비대에 의해 티베트로 가는 길목이 완전히 차단되었음을 안다. 특히나 정치적으로도 매우 민감한 지역이기에 이 지역에서 승려들이 국경을 오가는 행위는 더더욱이 주목받는 행위이다. 그래서 티베트 캄에서도 찾아오지 못했을까? 머나먼 여정을 떠나 겨우 국경까지 온 그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말이다.

티베트의 캄이 잘 보일만한 설산을 오르는 우르갼과 앙뚜,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길도 없는 산을 오르는 속에서 앙뚜는 입을 연다.

“스승님, 스승님과 함께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당신을 돕는게 제 삶이죠.”

“스승님과 있으면 늘 좋았어요.”

“그럼 계속 모셔야겠네요. 그게 제가 할 일이죠.”

<결국 티베트 캄을 가지 못하는 현실 앞에 놓인 둘>

이윽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가 쏟아지는 가운데,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비탈에 와서 앙뚜는 스승이 꺼낸 뿔소라를 들고 티베트 캄을 향해 분다. 내가 여기까지 왔다, 내 걸음을 보고 내 소리를 들어달라는 감정을 담아 부는 그 파장은 눈보라가 치는 산 속에서 너무나 여리게 울린다.

결국 다시 기나긴 여정을 거슬러 마을로 되돌아와야 하는 그들, 그들 앞에는 새로운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 티베트의 접경지인 시킴의 한 사원에서 린포체로서의 교육을 허가한다는 알림이 와 있었다.

새로운 갈림길에서 우르갼은 앙뚜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이미 수 차례 짧게 헤어지고 만났지만 지금의 이별은 꽤 긴, 혹은 영원한 이별일 수 있음을 알기에 우르갼은 앙뚜를 다독이고 또 다독인다.

눈이 없는 그 곳에서, 라디크의 마을에서 했던 눈싸움을 기억하며 눈을 쥐는 시늉으로 눈싸움을 하던 둘, 우르갼은 무형의 눈덩이를 맞고 쓰러진채 쉽게 일어서지 못한다. 걱정되어 다가가는 앙뚜에게 우르갼은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고한다.

<헤어져야 하는 현실은 늙은 고승에게도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함께 살면서 행복했었습니다. 린포체, 고마웠습니다. 미안하지만 저는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열심히 살아가셔야 합니다. 아셨지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엉엉 우는 앙뚜 옆에서 눈물을 닦던 우르갼은 마지막까지 스승으로서 앙뚜를 안는다.

“울지마세요. 나중에 커서는 누구보다 훌륭한 분이 될 거예요. 다른 린포체처럼 당신도 당신의 사원을 찾아갈 겁니다. 린포체, 저는 믿어요. 당신은 훗날 꼭 훌륭한 분이 될 거라고…”

그 다짐 속에서 헤어지는 둘, 그리고 설산을 오르며 홀로 마을로 되돌아가는 우르갼의 모습을 비추는 카메라. 그 설산의 정상에서 두고온 린포체 앙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우르갼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린포체는 저와 약속했어요. 언젠가 돌아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스승님은 제가 모실거예요.>

그리고 영상은 다시 예전 둘이 함께 생활했던 라디크의 작은 사원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작은 방에 누워있는 앙뚜와 우르갼.

“15년 후에는 제가 공부를 다 마쳤겠죠?”

“저는 늙어서 아이처럼 되어있을겁니다.”

“스승님은 제가 모실거예요.”

“모신다고요?”

“상상만해도 행복해지네요.”

그 어린 린포체의 말을 가슴에 담고 늙은 승려는 발걸음을 옮겨 끝 없는 설산을 가로지른다. 어리지만 너무나 큰 제자를 떠나보낸 스승은 그 말이 이루어지기 전에 생이 다하더라도, 다음 생에서라도 어떤 모습으로건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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