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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세계路]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4편 <낙산 역사트레킹> – 곽동운

1편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잠깐 다시 복기해본다. 

좌청룡·우백호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울에도 좌청룡과 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동쪽-청룡’, ‘서쪽-백호’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남쪽-주작’, ‘북쪽-현무’도 빼놓을 수 없다.

일단 우백호는 어디일까? 인왕산이다. 경복궁 옆쪽에 우뚝 서 있는 인왕산이 서울의 우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이화동 벽화마을을 품고 있는 산이 바로 그 낙산이다.

● 우백호의 위세에 눌린 좌청룡

<낙산공원에서 본 인왕산>

낙산(駱駝)은 높이가 약 125미터로 키가 작은데 산의 형세가 낙타 등처럼 보인다하여 낙산 또는 낙타산이라고 불린다. 낙산은 인왕산과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낙산은 좌청룡이기에 우백호인 인왕산과는 필연적으로 ‘용호상박’을 해야 하는 팔자다. 청룡과 백호의 피할 수 없는 한 판 승부! 당신은 어디에다 베팅을 할 것인가?

– 세상을 뒤흔들 세기의 맞대결! 메가톤급 강펀치가 천지를 진동한다. 세상의 모든 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청룡과 백호의 물러설 수 없는 한 판! 그 세기의 대결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마감 임박~!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는 법이다. 저렇게 프로모션을 띄운다고 해도 결과는 뻔하다. 세기의 대결치고 진짜 ‘세기의 대결’이 펼쳐진 거 본 적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서울의 청룡은 백호에게 게임이 안 된다. 체급부터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낙산은 해발고도가 125미터로 338미터인 인왕산에 비해 키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낙산(동), 인왕산(서), 남산(남), 북악산(북)을 묶어 내사산으로 칭하는데 그 내사산 중에서 낙산이 가장 작다. 참고로 북악산은 342미터이고, 남산은 270미터이다.

해발고도가 낮으니 낙산은 산세도 그리 웅장하지 못하다. 이에 비해 인왕산은 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돌출된 암반면이 소나무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300미터급 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고 있다. 

그렇게 우백호보다 기량이 딸리는 좌청룡이었기에 그것을 보완해야 했다. 

동쪽에 있는 좌청룡은 남자, 장자를 뜻했다. 이에 비해 서쪽에 있는 우백호는 여자, 차자 등을 뜻했다. 적장자 중심의 왕위계승을 중시했던 조선이었기에 좌청룡에 대한 보완은 분명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짓자고 역설한다. 그리고는 궁궐의 방향을 동쪽인 낙산으로 향하게 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이것이 인왕산 주산론이다. 

하지만 당시의 실권자였던 정도전 세력들은 인왕산 주산론을 반대한다. 궁궐의 방향을 서쪽으로 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정도전을 위시한 유교세력들의 주장이 힘을 얻었고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북악산 아래에 들어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북악산 주산론이다.

● 200년 후를 내다본 무학대사?

이렇게 자신의 주장이 꺾인 무학대사는 이런 말을 남기며 탄식했다고 한다.

“200년 뒤 경복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희들이 알겠느냐!”

여기서 다시 한 번 1편,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한 내용을 재론해보겠다. 

1편에서는 ‘기도빨’이 잘 받는 인왕산 선바위가 정도전을 위시한 유교 세력에 의해 한양도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기술했었다. 그리고 이번 편에서는 인왕산 주산론이 탈락되고, 북악산 주산론이 채택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듯 무학대사를 위시한 불교세력들은 유교세력들에 의해 번번이 자신의 의사가 꺾이고 만다. 불교세력들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무학대사가 200년 후를 내다보며 저런 이야기를 했을까? 무학대사가 노스트라다무스도 아닌데… 불교세력이 밀려난 후, 200년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를 했을 때가 1394년이었으니, 200년 후는 1590년대였다. 그 즈음에 누구나 다 아는 전쟁이 일어났다. 그렇다. 임진왜란이라 불리는 조일전쟁이 1592년에 벌어진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정말 무학대사는 200년 후를 내다보며 저런 예언을 했던 것일까? 1편에서도 언급했듯이 ‘불교 VS 유교’ 간의 갈등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무학대사의 예언은 개국 초기가 아닌 조일전쟁 이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당시의 민초들은 지배층이었던 사대부들에게 전란의 책임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백성도 버린 지배층에 대해서 힐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책임을 묻는 자리에 무학대사를 등판시킨 것이다. 자신들의 울분과 설움을 무학대사에게 투영하여 당시 지배층인 사대부들을 꾸짖고 있었던 것이다.

● 동인의 핵심 김효원이 살았던 낙산

<낙산성곽길의 가을 풍경>

낙산은 야트막한 산세 때문에 산책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숲길이 우거져 있어 낙산 인근에는 별장들이 많았다. 인조의 셋째 아들이었던 인평대군이 지은 석양루(夕陽樓)를 비롯하여 18세기에 활약했던 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 많은 별채들이 있었다.

명사들도 많이 살았다. 태종의 외손이었던 남이 장군,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동서분당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김효원도 낙산 기슭에서 살았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동인이라고 불렀다. 이에 비해 서인의 거두 심의겸의 집은 지금의 덕수궁 근처라 한양의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심의겸을 따르는 이들을 서인이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도 낙산에 은거해 살았다고 한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 땅으로 유배를 떠나고 난 후, 폐서인이 된 정순왕후는 이 산 아래에 있는 청룡사의 승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임을 떠나보냈던 정순왕후는 이 산 동쪽에 있는 동망봉에 올라 매일같이 치성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낙산 정상에 올라서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성북동 성곽길의 풍경>

앞서도 언급했듯이 낙산은 서울의 안쪽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 중에 가장 키가 작다. 그래서인지 한양도성 낙산 구간은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보다 훨씬 더 걷기 편하다.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에는 간간이 급경사 구간이 있지만 이에 비해 낙산 구간은 시종일관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선조들에게는 왜소한 좌청룡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성곽길을 탐방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찬사를 받는 것이다.

또한 접근성도 상당히 좋다. 전철역에서 바로 성곽길 트레킹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하차한 후 흥인지문(동대문)을 둘러본 후 성곽길을 따라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것이 낙산트레킹의 큰 장점 중에 하나다.

<낙산 성곽길을 따라 만나는 이화동 벽화마을>

그렇게 성곽길을 타고 올라가다보면 이화동 벽화마을도 만날 수 있다. 벽화마을을 탐방한 후 언덕길을 올라가면 낙산 정상부인 낙산공원에 다다르게 된다. 

이 곳에 올라 서면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멋진 풍광을 만날 수 있다. 무언가 꽉 막혀 있던 것들이 확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또한 한양도성이 어떤 방식으로 내사산을 연결하여 축조되었는지 찬찬히 따져 볼 수 있다.

낙산 구간은 다양한 시기의 성벽돌을 관찰하기에 제격이다. 한양도성의 성벽돌은 크게 4시기(태조-세종-숙종-순조)로 나눠볼 수 있는데 낙산 구간에서는 각 시기의 성벽돌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다. 후기로 갈수록 치석(治石)의 강도가 세지고, 돌의 크기도 더 커지는데 순조 시기에는 큰 주사위돌 같은 형태를 나타낸다.  

●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북한산 바라보기

<낙산공원에서 본 북한산>

낙산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북한산을 가깝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 등의 동북쪽 봉우리들뿐만 아니라 보현봉이나 형제봉 같은 남쪽의 봉우리들까지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참가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저 북한산 좀 보세요. 위쪽으로는 살짝 도봉산까지 보이죠? 북한산을 한 눈에 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보려면 이 낙산만큼 좋은 곳도 없습니다. 낙산이 키가 작아도 이렇게 참 실하지 않습니까?”

<축조시기가 다양한 성벽 돌의 모습>

성곽길 낙산 구간이 끝날 무렵에는 동소문이라고 불리는 혜화문을 만나게 된다. 혜화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199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복원됐다. 낙산 역사트레킹은 북악산 성곽길도 걷는다. 그렇게 성북동 인근 북악산 구간을 걷다 와룡공원을 지나게 된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떠나기 좋은 계절이 왔다. 하지만 미세먼지니 황사니 하는 것들이 신경 쓰인다. 그렇다고 우리가 안 떠날 줄 알고! 떠날 사람은 다 떠난다. 

그렇다. 이번 주말 서울의 좌청룡인 낙산으로 떠나보자.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해서 낙산 공원에도 올라보고, 걷기 편한 성곽길도 걸어보자. 시원하게 펼쳐진 북한산을 바라보며 인증샷도 찍어보는 것이다.

● 낙산 역사트레킹

1. 코스: 흥인지문 ▶ 이화동벽화마을 ▶ 낙산공원 ▶ 혜화문 ▶ 와룡공원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지하철1,4호선 동대문역 / Out: 와룡공원(성북동)

 

*본 기사는 월간 로드프레스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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