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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세계路] 뉴질랜드 3,000km의 트레일, 테아라로아를 걷다 ③ – 김혜림

#1. 걷는 일상이 익숙해지기 전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다시 바다를 향해서 걷는다.

셋이 걷게 된 우린 “Push!”를 외치 서로에게 박차를 가하며 오르막길도 힘차게 걸어 올라갔다. 독일에서 온 두 자매와 함께 하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척척 척척’ 발을 맞추며 힘차게 걸어 나간다.

지나온 산처럼 깊지 않고 비교적 길이 편하게 닦여 있는 숲을 걸으며 한걸음 한걸음을 즐겼다. 하이커들을 아직은 많이 만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펼쳐질 여정에 기대가 가득했다.

파히아(Pahia)를 향해 걸었다. Bay of island의 대표적 관광지로 알려져 있는 이곳은 우리에게 재보급을 할 수 있는 상점이 있고 휴양지의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뉴질랜드 사람들도 휴가철에 자주 찾는 곳이다.

<동산을 넘어가면 바다가 있다.>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나올 듯 나오지 않는 상점들을 외치며 걸었다. 케리케리와는 다른 느낌의 휴양지였지만 다시 늘어난 관광객들 사이에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순간이 즐거웠다. 아직은 문명이 더 익숙하다.

숙소는 이미 예약이 꽉차거나 가격이 비싸 홀리데이파크를 찾았다. 오늘도 긴 길을 걸어온 서로를 격려하며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는 호사를 누렸다.

주방에서 저녁을 하는데 다른 하이커를 만났다. 40대는 족히 넘어 보이는 피터아저씨.

TA 하이커이고 나보다 늦게 출발했다고 한다. 진흙으로 얼룩진 옷, 헝클어진 머리와 모자 오랜시간 걷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지만 다른 하이커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입고있는 스포츠 웨어에는 울트라마라톤참가를 기념하는 문구가 적혀있었고 배낭은 앞뒤로 맬 수 있게되어 있고 작은 가방이 세 개로 나뉘어져 앞에 두 개, 뒤에는 한 개를 매고 있었고… 거의 가방을 입는 느낌에 가까워 보였다.

보이는 모습처럼 그는 울트라 마라톤을 즐겨왔으며 TA를 걸어왔다지만 사실 뛰어왔다는 말이 적합했다. 뛰고 걷고 뛰며 자신의 한계와 마주하며 단기간에 완주할 것을 목표로 극한의 뉴질랜드를 즐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조리도구를 전혀 갖고 있지 않는 다는 것.

처음에는 챙겨왔지만 생각보다 무거워 집으로 모두 돌려 보냈고 식사는 오트와 견과류가 전부라고 했다. 정말 생존만을 위해서 먹고 있었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내가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큰 원동력이자 지친 하루를 달래주는 것이 텐트안에서 마시는 따뜻한 스프 한 모금이었다. 조리 도구 없이 트레일을 걷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다. 나는 기꺼이 그 무게들을 감당할 수 있다.

이렇듯 TA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했다. 달리는 사람이 있고 한번에 걷는 사람도 있으며 긴 시간 나눠서 걷는 사람도 있었다. 각자의 방법대로 즐길 뿐이었다.

어스름하게 노을이 깔린 바다를 앞에 두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리를 찾아 텐트를 치고 휴식을 즐겼다.

이 곳 저곳에서 흘러나오는 고기냄새가 유혹했지만 내가 끓이고 있는 라면도 그 이상으로 맛있었고 식후엔 고급음식인 파인애플을 잘라 나누어 먹었다.

신선한 음식에 대한 갈증도 해소되어 갔다.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2. 부상

워터택시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야 한다. 워터 택시의 시간에 맞추기 위해 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출발 시간이 생각보다 늦어져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마음이 급해진 우린 거의 뛰듯이 전투태세로 걸어 나갔다.

‘척척 척척’

우리의 발걸음 소리와 스틱소리는 일정한 박자에 맞춰지고 있었다.

해안 길을 따라 굽어진 길을 3km를 걸어가면 선착장이 나타난다. 구불구불 해안 길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길들이 나있었고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길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채 고군분투를 하며 걸었다.

달리다시피 걷고 있는데 무릎에서 ‘찌릿’ 하는 느낌이 들었다.

<바다를 향해 비탈길을 내려가는 일행>

놀랐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어 계속 걸었다. 이어서 반대쪽 무릎에도 이상이 생겼다. 속도를 낼수록 무릎의 통증은 거세져 갔다. 이제 몸에서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속도를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통증이 몰려왔다. 친구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결국은 무리에서 홀로 뒤쳐졌다.

커브를 돌아 이미 앞서 걷고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최대한 통증이 심해지지 않도록 스틱에 의지하며 걸었다. 고작 3,000km중 200여 km를 왔다. 앞으로 2,700여 km를 걸어 가야 하는데 벌써 부상이라니 끔찍한 일이었다.

최악의 상황으로 무릎이 더 나빠져 일정이 연기되거나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을 생각하니 절대로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무릎의 회복을 위해서 천천히 걸어 길을 완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행히 시간내에 도착한 선착장에는 어제 만난 피터아저씨와 페이스북 테아라로아 페이지에서 봤던 바트가 이미 도착해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SNS에서의 만남이 오프라인으로도 연결이 되었다.

5명의 하이커는 함께 바다를 건넜다. 각자의 속도에 맞게 걷다보니 자연스레 다시 우리 셋은 함께 걷고 있었다.

뜨거운 날씨는 우리를 지치게 했지만 우연히 만난 계곡은 오아시스가 따로 없었다.

잠시 쉬어가며 물을 채웠고 그곳에서 다시 만난 네델란드 친구 바트와 함께 길을 이어갔다. 뜨거웠던 햇볕은 갑자기 어두운 먹구름으로 덮이기 시작하며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운행은 마무리하고 근처에서 하루 머무를 곳을 찾아야 했지만 도로가의 가정집들 밖에 없었다.

이때 지나가던 트럭이 차를 세우고서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이때다 싶어 근처에 텐트를 칠만한 곳을 물었더니 흔쾌히 옆에 보이는 집에 들어와서 넓은 마당에 텐트를 치라고 했다. 허름하고 작은 집이었지만 마당은 운동장만큼 넓었다.

그 집에 들어서니 키가 크고 농구 유니폼 상의을 입은 청년이 다가와 누구냐고 묻기에 사정을 말하니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집주인에게 물어봐야한다고 했다. 주인아저씨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며 당황한 눈치였다.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했던 아저씨는 함께 일하는 친척이었고 주인은 아니었다.

이 상황에 우리도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하루만 마당에서 텐트치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잠깐 생각을 하시더니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다.

<호의를 베풀어준 마오리 가족>

우리에게 다가왔던 청년은 자신을 ‘화이트 마오리’라며 뽐냈고 우리 모두에게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생김새는 마오리와 비슷했고 피부는 흰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마오리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활발하고 사교성 좋은 친구였지만 풍기는 술 냄새와 언뜻 무례하게 느껴지는 과도한 친절함에 경계를 하게 되었다. 적당한 선을 지키며 그를 대했고 서둘러 텐트를 쳤다. 텐트를 치는 동시에 거센 빗줄기가 쏟아졌다. 다행히 비가 오기 전에 나의 공간을 만들었으니 오히려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경계는 기우였다. 그들은 단란한 마오리 가족이었다. 처마 밑에서 저녁을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의자를 가져다 주었고 우리에게 고기와 음식을 내어 주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의 여행을 궁금해하며 연신 질문을 이어갔다.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는지, 언제 만나 함께 걷게 되었는지 이런 이야기들이었다. 집 앞의 마루에서 비를 피하며 저녁을 준비를 하며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트레일을 지나는 길에 집이 있기에 하이커들을 종종 봤지만 이런 대화를 처음 해봤다며 아이들도 낯선 여행객들이 신기한지 우리 주변을 맴돌며 장비들을 구경했다.

<하루를 신세 진 앞 마당에서 정리중인 바트>

가족들이 고맙게도 아침까지 제공해준 덕에 빵과 땅콩버터, 황도까지 잘 먹고 길을 나섰다. 우리로서는 고급음식인 캔 통조림으로 영양까지 충족되었다.

첫인상은 낯설어 어려웠지만 낯선 여행객에게 인정을 베푸는 따뜻한 마음에 든든하게 충전이 되었다. 고마운 마오리 가족들이다.

 

#3. 차이

 사냐와 세라, 바트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자연스레 그룹이 되었다. 각자의 속도에 맞추어 걷다가 함께 점심을 먹고 함께 저녁을 먹으며 다음 목적지를 정하며 하루에 있었던 얘기들을 나누었다. 홀로 뉴질랜드의 산과 바다를 찾아 여행하는 독일 청년과 잠시 함께하기도 했다.

<포후투카 나무와 바다>

높지 않은 산들을 지나 바다를 만나고 지나치던 바다에서 절벽에 포후투카 나무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평소 꽃에 관심이 크게 없던 나에게도 무척 아름다웠다. 해변주변의 척박한 절벽에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꽃을 붉게 피워낸 이 나무는 파란 바다와 대조되어 감탄을 자아냈다. 마오리 나무라고 불리기도 하며 영어명은 뉴질랜드 크리스마스 트리이다. 크리스마스 시즌 즈음에 피는 꽃 나무이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서인지 만개하였고 걷는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특히 해변을 지나치기 어려웠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서핑으로 유명한 이곳은 서핑을 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내가 보고 자라온 우리나라와 파도의 크기가 달랐다. 파도가 더 높았고 더 강했다.

새로 합류한 독일친구가 파도를 타고 노는 법을 알려줬다. 파도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뒤에서 다가왔을 때 파도의 방향으로 뛰어 들어 타이밍이 맞으면 파도를 탈 수 있다. 쑤욱~ 이런 느낌으로 밀려가는 순간 희열이 느껴졌다. 쌓였던 피로가 파도와 함께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샤워장이 따로 없어 바다를 향해 흘러내려오는 모래위에 얕게 고여있는 강물로 바닷물을 씻어냈다.

급할 이유가 없다, 모든 피로가 리프레쉬 되었다. 새롭게 출발!

즐거운 하루 하루 속에서 고민이 생겼다.

같이 걷는 인원이 많아지면서 문득 무리 속에서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순간이 생겼다. 우리의 대화는 영어였고 나는 간단한 대화는 할 수 있지만 사람이 늘어갈수록 빨라지는 영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 무리 안에서 나의 역할이 없는 것만 같고 가끔 섞이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여럿이 다니다 보니 내적으로 이런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이럴수록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내가 벽을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야함을 느꼈다. 나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잃지 않고 내 여행을 할 것을 다짐했다.

나를 다독이는 친절한 친구들 덕에 잘 걸어 내려왔다. 그동안 잠시 함께했던 독일친구는 서핑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며 다른 해변으로 갔고 우린 다시 4명이 되었다.

사설 캠핑장인 Jagger’s Camp에서 묵었다.

주인은 없고 몇 개의 캐빈이 있었으나 최소 몇 년은 방치되어 쥐가 나올 것 같아 지붕아래 개인 텐트를 쳤다. 주방엔 낡은 도구들과 빛바랜 비틀즈의 사진이 박혀있는 시계가 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몇 병의 맥주와 간식이 있었다.

오래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이곳은 도네이션으로 운영되었다. 제주도에 있는 무인 카페와 비슷한 시스템이다. 사용하고 양심껏 비용을 지불한다. 지키는 사람도 없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여행자의 양심에 맡길 뿐.

<나무에 걸터 앉아 일정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는 중>

우리는 앞으로의 일정을 짜기 위해 회의를 했다. 크리스마스에 바다를 건너 가야하는 길이 있어 어느 곳에서 배를 탈것인지를 의논했다. 세 친구들의 의견은 황가레이 항구 근처에 배의 주인이 있으니 더 들어가지 않고 근처에서 배를 타거나 최대한 덜 걷도록 배가 나올 수 있도록 부탁해 보자는 것.

나의 의견을 물어봤을 때 단체 생활에 익숙했던 나는 나보다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에 마지 못해 친구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테아라로아 완주를 통해 케냐 소녀들을 돕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나로서는 일부를 건너 뛴다는 것은 용납이 안 되었다. 사람들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 같기도 하고 이 길의 끝에서 나에게 떳떳할 것 같지 않았다.

매일 걷는 생활에 지친 친구들은 줄어든 거리만큼 여유가 생겼다며 좋아했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고민에 휩싸여 혼자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언니인 사냐가 말을 걸어왔다.

“집이 그리워?”

사냐는 내가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걱정이 되어 말을 걸어왔다.

“아니. 영어가 잘 안되니 의사소통도 안 되고…”

사냐는 자신의 텐트로 뛰어가더니 여행자용 그림책을 가져왔다.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가져온 이 작은 그림책이 해결 방법이라 생각했나보다. 고마움과 예상하지 못한 귀여움에 웃음이 피식 새어나오며 솔직히 말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내 의견을 정확히 말을 할 수 없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테아라로아의 전 구간을 걷고 싶어. 사람들과도 약속했고..”

“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네가 끝까지 걷고 싶다고 말했다면 우린 그것에 대해서 얘기하거나 각자 원하는 곳에서 만나든지 했을 거야.”

왜 나는 명확하게 내 의견을 말하지 못했을까. 팀에서 다수를 위해 개인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옳다고 생각해 왔지만 늘 옳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표출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고 더 합리적인 답을 찾아 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내가 생각한 배려가 배려가 아닐 수 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단적이지는 않되 나를 희생하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화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가끔 다르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함께 식사를 하거나 간식을 먹을 때 음식을 나누어 먹는 문화가 익숙한 나는 당황스러웠던 적이 간혹 있었다. 처음엔 많지는 않지만 내 음식을 함께 먹자고 먼저 열어놓았는데 친구들이 각자 자신의 음식만 조용히 식사하던 모습이 인색하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이것이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피해주지 않으려는 문화 차이였던 것 같다. 작은 것도 나누어먹는 기쁨을 느끼는 우리 문화를 좋아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이 곳의 문화가 익숙해져 한정된 식량에서는 오히려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은 배를 탈수 있는 위치는 우리가 정할 수 없었다.

선주의 집 앞 선착장까지 가야했다. 그래서 난 일행들보다 새벽에 출발해 황가레이 항구를 찍고 선착장으로 돌아와 만나서 함께 배를 타기로 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결론으로 깔끔히 정리가 되었다.

  

#4. 크리스마스 이브

 이 바닷길을 쭉 따라 걸어 가다보면 머지않아 숙소가 나타날 것이다.

바트는 오늘은 힘들지 않을 것이라며 빨리 가서 쉬자고 제안했다. Appin Cottage로 숙소를 정했고 크게 힘들이지 않고 도착했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갤러리의 뒷마당에 캠핑을 할 수 있는 공터가 있고 식수와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사설 캠핑장이었다.

<Appin cottage 뒷마당에서 캠핑을 마치고 준비중>

넓지는 않지만 저렴한 가격과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주인 할아버지는 반갑게 우릴 맞아주었고 갤러리의 작품을 구경 시켜 주셨다. 그리고는 크리스마스 이브라며 저녁에 초대하셨다.

일찍 운행을 마치고 늦은 점심으로 특별한 날엔 특식이라며 아끼던 인스턴트 파스타를 무려 두봉지를 뜯어 캐롤을 흥얼 거리며 먹었다.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몸이 안 좋은 바트는 텐트에서 쉬었고 한껏 들뜬 세라와 좀 더 깨끗하게 세수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약속된 시간에 할아버지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Appin Cottage 주인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예술가였다. 방안에는 많은 그림이 걸려있었고 오래된 장식품들이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러 그림의 주인공은 한 여인이었다.

할아버지의 뮤즈는 아내인 듯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안계셨다. 할아버지는 3년 전에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크리스마스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말을 하시며 쓴 잔을 비우셨다. 올해에는 우리가 그 허전함을 조금이나마 채워주었기를 바랬다. 우리 일행과 조금 전에 도착한 미국인 하이커 그리고 할아버지는 역사, 정치, 여행, 음식, 문화 등 주제를 막론한 이야기 꽃을 피웠다.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온 나에게 스코틀랜드에서 사는 친구가 한국전쟁에 참전 했었다며 사진 보여줬다. 자국이 아닌 우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외국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밀려왔다. 그 상황을 떠올려보니 휴전상황이긴 하지만 불과 몇 십년 전 전쟁과 가난에 허덕이던 한국이 아닌 마음 먹으면 해외를 여행할 수 있고 꿈을 꿀 수 있는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난 것에 감사했다. 

우린 음식에 집중했다. 처음 보는 여러 가지 종류의 치즈, 쿠키와 직접 구워주신 애플파이는 포만감을 넘어 마음까지도 풍성해지는 맛이었다. 사진들을 꺼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느낌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외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우리나라의 명절과 같다고 한다. 온가족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선물을 주고 받는 날을 친구들과 할아버지와 함께 보내어 외롭지 않게 따뜻하게 보냈다,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있었다.

이제 내가 뉴질랜드의 처음으로 도착했던 오클랜드를 향한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본 기사는 월간 로드프레스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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